최근 미국-이란의 충돌 등 중동 지역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아지면서 중동에 크게 의존하는 국내 원유 수입을 미국산 등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다만 업계는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측면에선 맞는 말이지만, 미국산 원유의 의존도를 크게 높이는 건 무리라고 본다.
16일 한국석유공사 석유정보 사이트 ‘페트로넷’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국내 정유사들이 중동 지역(사우디아라비아 등 6개국)에서 수입한 원유는 6억9025만배럴(70.3%)로, 미국에서 수입한 원유 1억2457만배럴(12.7%)보다 다섯배 가량 많았다.
중동산 원유 가격이 미국산보다 비싸다는 점을 고려하면 언뜻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14일(현지시간) 기준 국제 시장에서의 중동 두바이유 가격은 배럴당 64.78달러로, 미국의 서부텍사스산 원유(배럴당 58.23달러)보다 6달러 이상 비싸다. 미국의 경우 ‘셰일혁명’ 이후 자국 내 원유 공급이 과잉 상태라 가격이 낮게 형성되고 있다.
품질도 미국산 원유가 더 좋은 것으로 평가된다. 중동산 원유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중유·등유 등이 많이 생산되는 고유황 중질유다. 반면 미국산 원유는 휘발유가 상대적으로 많이 나오는 저유황 경질유라 고품질로 간주된다.
게다가 중동산 원유의 경우 지정학적 리스크가 있는 등 수입 과정에서의 변수도 크다. 실제로 지난해 9월 사우디아라비아 원유 설비가 폭격을 받으며 국내를 비롯한 전세계 원유 수급이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최근에는 미국-이란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국내 중동 원유 수입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중동산 원유는 미국산보다 비싸고 품질도 낮으며 수입선이 불안정한데도, 국내 정유사들은 중동산 원유를 고집하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 정부가 자국 내 원유 수출을 허용한 이후 한국의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2015년 81.7%에서 최근 70.3%까지 감소하긴 했지만, 아직 한국의 중동산 원유에 대한 의존도는 압도적이다.
정유업계는 그 이유로 생산 설비 문제를 든다. 과거 중동 의존도가 80~90%로 높았던 국내 정유사들은 그동안 고유황 중질유인 중동산 원유의 특징에 맞춰 생산 설비를 갖추고 정제했는데, 이를 저유황 경질유인 미국산 원유에 맞춰 바꾸는 건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원유 정제 설비는 한번 세팅되면 상황에 따라 다시 바꾸는 게 쉽지 않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정제 과정에서 벙커씨유 같은 중질유가 많이 나오는 중동산 원유에 맞춰 설비가 돌아가도록 했는데, 미국산 원유가 설비에 들어온다면 오히려 더 비싸지는 등 적합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미국산 원유는 운송비가 비싸고 수송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도 있다. 중동산 원유는 페르시아만과 말라카 해협을 거쳐 바로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지만, 미국산 원유는 멕시코만에서 남미 대륙을 크게 돌아 태평양을 건너 온다는 것이다.
북미-남미 대륙의 중간인 파나마 운하를 거쳐 운송하는 것도 쉽지 않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파나마 운하는 좁고 얕아 유조선 같이 큰 배가 지나다니기 어렵고, 워낙 정체된 뱃길이라 통과도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미국산 원유는 중동산보다 운송비가 배럴당 2~3달러 비싸고, 수송 기간도 한달 가량 더 걸린다고 알려졌다.
지난 2015년 미국 정부가 자국 원유 수출을 허가한 이후 미국산 원유의 국내 수입 비중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지만, 아직까진 중동 원유를 일부 대체하는 수준이라는 설명이다. 현재는 공급 과잉으로 미국산 원유의 가격이 낮지만, 미국의 원유 수출 인프라가 구축되고 적체된 물량이 해소돼 정상 가격을 되찾으면 싼 가격이라는 장점이 없어진다.
이 때문에 미국산 원유는 국내 생산 설비를 바꿀 정도로 의존도를 높이기보다, ‘수입선 다변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미국산 원유에 의존하는 건 또 에너지 안보나 경제성 측면에서 맞지 않다”며 “중동 원유의 일부를 대체하는 역할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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