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여파로 美-유럽 판로 막혀… 기존 수출계약도 대금결제 지연
전북에서 액세서리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A 씨의 회사는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된 지난달 20억 원이 넘는 수출 계약 물량을 취소당했다. 한 해 매출의 6분의 1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 회사는 생산량의 90% 이상을 미국에 수출해왔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판로가 막힌 것은 물론이고 대금 지급도 지연되고 있다. A 씨는 “물건을 보내면 대개 15∼60일 내에 돈을 받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대금을 6개월 뒤에나 준다는 거래처도 있다”며 “4월 한 달간 50명 넘는 직원을 모두 유급휴가 보냈는데 휴가가 두세 달 연장될 각오까지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에서 중고차와 차량부품을 중동에 수출하는 B 씨 회사도 최근 매출이 40% 이상 줄었다. 중고차 특성상 거래처가 직접 방문해 차 상태를 확인해야 하지만 출입국이 제한되거나 항공편이 취소돼 물건을 보러 올 수 없게 됐다. B 씨는 “내년 상반기까지는 계속 어려울 것 같은데 담보 여력이 없어 추가 대출을 받기도 힘든 처지”라고 했다.
코로나19로 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수출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해지고 있다. 신규 수출 계약이 취소되는 데다, 기존에 수출한 물량도 대금 결제가 몇 달씩 지연되는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 긴급경영자금 신청액, 벌써 지원 예정 금액 넘어서 ▼ 정부 공식 통계로는 3월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0.2%만 줄어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정작 수출 현장에서는 이달부터 본격적인 경영 압박에 시달릴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9만5229개에 이르는 수출 중소기업은 지난해 미중 무역분쟁과 일본 수출 규제 등으로 자금난을 겪는 상황에서 또다시 코로나19의 타격을 입고 있다.
전남에서 멸치 등 수산물을 수출해 온 C 씨는 지난해 일본 수출 규제로 위기에 처하자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중진공)에서 특별경영안정자금 6억 원을 빌려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올해 코로나19를 만나며 다시 수출길이 막히게 됐다. 그는 “조금이라도 팔아보려고 3월 중순쯤 컨테이너 한 개 물류비를 모두 내고 3분의 1도 안 되는 양을 채워 보냈다”면서 “추가 대출은 꿈도 못 꾸고 내년이면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데 막막하다”고 했다. 자금난에 처한 기업들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정부 지원 프로그램도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다. 중진공은 코로나19 피해 중소기업에 7000억 원의 긴급경영안정자금을 지원할 예정이지만 3일 현재 신청금액(7418억 원)이 지원액수를 넘어섰다.
대출 조건도 까다롭다. 미국과 독일에 수출하는 전북의 D의류업체는 벌써 1년 매출의 20%에 해당하는 2억 원어치 계약을 취소당했다. 예상치 못한 돌발 악재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 회사는 중진공 긴급경영안정자금을 신청하지 못한다. 2년 연속 적자, 자본 잠식 등으로 경영지표가 안 좋은 기업은 정책자금 지원 대상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이번 위기만 넘기면 다시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데 신청 대상조차 안 된다니 힘이 빠진다”며 “봄철은 주문이 많고 바쁜 시기인데 창고에 완성품들을 그대로 쌓아두고 있다”고 했다.
산업계에서는 이미 기업들의 수출 실적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고 4, 5월부터는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3월 실적을 기간별로 나눠보면 1∼20일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0% 증가했지만 21∼31일 수출은 15% 감소했다. 코로나19 전파 속도가 빨라지면서 수출 타격도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무역협회는 올 2분기(4∼6월) 수출산업경기전망지수(EBSI)가 79.0으로 2013년 1분기(1∼3월) 78.4 이후 7년여 만에 80 밑으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수치가 100을 밑돌면 수출 여건이 지금보다 나빠진다는 뜻이다.
세종=최혜령 기자 hersto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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