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사상 처음으로 SPV(특별목적회사)에 유동성을 지원해 저신용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에 나선다. 한은이 SPV에 제공하는 유동성은 20조원 안팎일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지원 구조는 나오지 않았지만 정책금융기관이 SPV 설립 후 한은이 유동성을 지원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다만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의 의결 등 사전 절차를 밝아야 한다.
22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제5차 비상경제회의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20조원 규모의 저신용등급 회사채·CP 매입 방안을 발표하며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정책금융기관이 참여하고 한은이 유동성을 지원해 저신용 회사채·CP까지 매입하는 SPV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구체적인 매입기구의 구조, 매입 범위 등은 한은과 함께 마련해 나가겠다”고 설명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 역시 지난 9일 회사채 시장 안정을 위해 정부 신용보증 하에 SPV를 설립해 회사채 등을 매입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식 지원 방안에 대해 “상당히 효과가 크다”며 도입 가능성을 연 바 있다.
유동성 지원 구조는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지만 정부의 재정 지원 하에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이 SPV를 설립하고, 한은이 SPV에 대출을 해주는 구조가 유력하다. 한은은 현행법상 직접 SPV를 설립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내부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한은이 SPV에 대출하는 방안은 한은법 80조에 근거한다. 한은법 80조는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중대한 애로’가 있으면 정부의 의견을 들은 후 한은이 금융업 등 영리기업에 대출을 해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은이 금융업 등 영리기업인 SPV에 대출을 해주고 SPV가 그 돈으로 저신용 회사채 등을 매입하는 구조다. 한은이 해당 조항을 발동하는 건 이번이 역대 세 번째다.
SPV를 통한 한은의 유동성 지원은 ‘대출’만 가능한 현 제도의 제약을 뛰어넘어 회사채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정부 지원액을 기반으로 몇 배의 레버리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점도 강점이다. 연준의 경우 재무부가 총 지원액의 약 10%를 자본금으로 제공하고, 연준은 대부분의 차입 기업이 채무를 상환한다고 보고 나머지 90%를 채운다.
다만 한은법 80조 발동은 금통위원 7명 중 4명 이상의 찬성 의결이 필요하다. 정부 결정에 의해 정해지는 게 아니라 한은 자체적 판단이 선행돼야 한다는 의미다. 금융위 관계자는 “아직 지원 구조 등이 확정되지 않았다”며 “한은과 이와 관련한 협의를 진행한다는 게 오늘 발표 내용”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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