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바뀌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숙명인가 봅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28일 03시 00분


[2020 新목민심서-공직사회 뿌리부터 바꾸자]
<10> 공무원이 보는 공직사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게 영화 제목이 아니라 우리의 숙명인 것 같습니다.”

세종시의 한 경제부처 공무원 A 씨는 지난 정권에서 국가 재정과 관련한 국정과제를 맡았다. 기존의 불필요한 정부 지원 제도를 정비해 재정 효율성을 높이는 게 그의 업무였다. 그는 자영업자 등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고 때론 원성을 들어가며 맡은 과제를 수행했다. 하지만 정권 교체와 함께 정부 정책이 180도 바뀌었고 그간의 업무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A 씨는 “지금 맡고 있는 일도 언제든 없던 일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공무원 10명 중 4명은 이처럼 정권에 따라 업무 접근 방식과 내용이 정반대로 바뀌는 상황을 공직자로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열심히 일하려는 공무원들의 발목을 잡는 요인인 것이다. 이는 본보가 지난달 11일부터 이달 2일까지 전국 공무원 100명을 상대로 ‘공무원이 보는 공직사회’를 설문한 결과다.

‘공무원으로서 자괴감을 느낄 때’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2.1%는 ‘정권에 따라 일의 결과물이 달라질 때’라고 했다. ‘경제적 보상이 불충분할 때’(24.2%), ‘국민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있지 않을 때’(15.8%)가 뒤를 이었다. 중앙부처 공무원 B 씨는 “무엇을 위한 일인지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시키는 일을 할 때나, 괜찮은 정책이 정권이 바뀌며 묻혀버릴 때 답답함을 느낀다”고 했다.

▼성과내도 보상 없고 정치권 눈치만… “기회 되면 민간 이직” 60%▼
<10> 공무원 100명 설문조사




“공무원은 일은 많이 하는데 어떨 때 보면 월급보다 욕을 더 많이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차라리 민간 회사에서 일하면 그래도 욕은 덜 먹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 한 중앙부처 공무원 C 씨는 “가끔 사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많은 업무량이나 낮은 보수는 어찌 보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나랏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예전 같지 않고, 공무원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너무 나빠진 것이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C 씨는 “열심히 일해도 티가 잘 안 나고 어디 가서 공무원이라고 인정받기도 힘들죠. 사명감만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10명 중 6명 “기회 되면 민간 이직”

본보가 직급과 연령대를 안배해 중앙부처 공무원 95명 등 총 100명의 전국 공무원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97명)의 59.8%는 “기회가 된다면 민간으로 이직해 일해보고 싶다”고 답했다. 사기업에서 일하면 폐쇄적인 조직문화에서 비롯된 답답함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민간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답한 한 공무원은 “사기업은 ‘보고를 위한 보고’ 등 불필요한 절차가 적어 업무 효율이 높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노동 시간이나 직원 복지 등에 대한 규정이 공직사회보다 더 잘 지켜질 것 같다” “업무 목표가 구체적이고 단순해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는 응답도 있었다. 일한 만큼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으로 꼽혔다.


공무원들이 사기업의 장점으로 꼽은 항목들은 뒤집어 보면 공직사회의 단점으로 주로 거론되는 부분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의 단점으로는 낮은 급여(37.8%)를 꼽은 응답자가 가장 많았고 센 노동 강도(21.4%), 폐쇄적인 조직문화(19.4%), 개인이 부속품처럼 느껴진다(10.2%)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직업으로는 안정적이지만 민간 기업과 비교해 보상이 만족스럽지 않고, ‘공무(公務)’를 위해 개인의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료 조직의 위상이 갈수록 낮아지는 것도 공무원들의 근로의욕을 갉아먹는 요소로 지적됐다. 중앙부처에서 일하는 40대 후반 과장급 공무원 D 씨는 “가족이나 친지들은 세종시 공무원으로 일한다고 하면 매우 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을(乙)도 이런 을이 없다”며 푸념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있는 정책, 없는 정책 모두 뒤져서 밤낮없이 자료를 만들어 내놓으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겨우 이 정도 내놓았느냐’며 비난이 몰려듭니다. 여론이 나빠지면 국회도 대책을 다시 만들라고 압박하죠. 이걸 매번 겪으면 정책 내놓기가 무서워집니다.”

상급자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게 아님에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는 상명하복식 업무 체계와 업무에 대한 지나친 책임 추궁, 올바른 정책보다는 ‘정무적 판단’을 강요하는 분위기 등도 공무원들을 힘들게 하는 요소로 거론됐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약이라고 해서 모두 국정과제로 삼지 말고 기존 정책과의 연계성을 감안해 공무원이 좋은 정책은 꾸준히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 그럼에도 60%는 “자녀에게 공무원 추천”

공무원 10명 중 7명은 다시 태어나면 공무원이 아닌 다른 직업을 택하고 싶다고 답했다. “이미 한 번 공무원을 했으니 다른 직업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녀를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 공무원이란 직업을 추천한다는 응답도 60.2%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여러 단점이 있긴 하지만, 안정적이고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 현실적으로 썩 나쁜 직업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무원의 장점으로 ‘안정적이다’(50.5%)와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41.2%)를 꼽은 응답자들이 대부분인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최근에 공무원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적이 있다는 응답도 약 60% 수준이었다. 공무원들은 “이해 당사자들이 우리의 설득에 공감해줄 때” “대민 업무를 하며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때” “내가 만든 정책이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답했다.

약 30년간 공직에서 일해 온 E 씨는 “하루하루 너무 정신없이 보내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그래도 10, 20년 전과 비교해 보면 나라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 정책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집단에 대해 공무원들은 청와대(30.6%), 언론을 포함한 여론(25.5%), 정책 이해관계자(21.4%), 국회(15.3%)라고 답했다. 조직 외부에서 공무 수행을 방해하는 요소로는 ‘일부 언론의 마녀사냥식 여론 몰이’ ‘여야의 정치적 갈등’ ‘쏟아지는 가짜뉴스’ 등이 꼽혔다. 조직 내부에서 공무 수행을 방해하는 요소로는 고시 출신과 비고시 출신의 갈등을 꼽은 공무원이 많았다.

세종=송충현 balgun@donga.com·남건우 기자
#공무원#공직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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