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 삼성물산 합병비율 공격, 금융당국 “5%룰 위반” 수사의뢰
검찰 “명확한 증거 안드러나”
재계 “지분 파킹 통해 5%룰 회피… 해외 투기자본에 맞설 방어권 줄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하며 삼성물산 지분을 대량 매입할 때 공시 의무를 위반한 혐의로 수사를 받아온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경영권 방어수단이 취약하다고 주장해 온 국내 기업들이 엘리엇과 같은 헤지펀드의 공격에 더 쉽게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검 금융조사1부(부장검사 오현철)는 지난달 엘리엇에 대해 무혐의 처분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엘리엇의 공시의무 위반을 입증할 명확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서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증선위)는 2016년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주식 대량공시 의무인 ‘5%룰’을 위반했다며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5%룰은 상장사 주식 등을 5% 이상 보유하거나, 5% 이상 취득 후 1%포인트 이상 지분 변동이 있는 경우 5일 이내에 보유목적과 변동사항을 상세 보고·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엘리엇은 2015년 6월 2일 삼성물산 지분 4.95%를 갖고 있다고 공시했으나, 이틀 뒤인 4일에는 7.12%를 보유했다고 공시했다. 이후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을 문제 삼으며 합병 반대에 나섰다.
당시 증선위는 엘리엇이 이틀 만에 지분을 대폭 늘린 과정에는 파생상품의 일종인 총수익스와프(TRS)가 있다고 봤다. TRS계약은 계약자(엘리엇)가 손익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증권사에 주식을 보유토록 하는 것. 금융당국은 엘리엇이 외국계 증권사를 이용해 삼성물산 지분을 대량 보유하고도 이를 고의적으로 누락해 공시 의무를 회피하는 이른바 ‘지분 파킹’을 해둔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엘리엇은 “TRS계약은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검찰이 엘리엇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서 재계에서는 경영권 방어가 더 어려워졌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계 전문가는 “주주가 주주권을 행사할 의도로 TRS계약을 맺었다면 당연히 공시 의무가 있는 것”이라며 “지분 보유의 실체가 아니라 표면만 보고 내린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해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세력에 ‘5%룰’을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을 공인해줬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이 모르고 있다가 해외 투기자본의 대량 지분 보유를 뒤늦게 알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고 했다. 엘리엇과 같은 헤지펀드가 경영권 분쟁이 예상되는 기업 지분을 5% 미만으로 보유했다가 분쟁이 본격화되면 TRS계약으로 숨겨 놓은 지분을 활용해 갑자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재계는 가뜩이나 기울어진 운동장이 더욱 기울어지고 있어 해외 투기 자본에 맞설 수단이 줄어들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정부가 입법예고한 상법 개정안이 감사위원 분리선임 및 의결권 3% 제한 등으로 대주주의 경영권을 흔드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해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개정해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를 지원한다며 5%룰로 불리는 ‘주식 등의 대량보고·공시의무’를 한 차례 완화하기도 했다. 경영권에 영향을 주기 위한 지분 보유가 아니면 5% 이상 보유해도 약식 보고가 가능한데, ‘정관 변경 요구’ 등을 경영권에 영향을 주는 행위에서 뺀 것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경영권 방어수단은 주지 않고, 5%룰 완화 등 공격 여지만 늘어나는 등 균형이 맞지 않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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