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정의선 부회장이 청와대와 실시간 화상 연결을 진행한 곳은 경기 고양시의 ‘모터스튜디오 고양’이었습니다. 현대자동차가 2017년 일산 킨텍스 인근에 일종의 ‘자동차 문화공간’으로 조성한 곳이지요. 자동차를 만드는 과정과 주요 기술을 실제로 작동하는 로봇을 포함한 시청각물을 통해 관람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가보신 독자분들은 잘 아시겠습니다만 ‘모터스튜디오 고양’의 널찍한 입구 로비에는 평소 다양한 실제 판매 차량을 전시해놓습니다. 이번에 정 부회장은 바로 이 장소에서 제법 큰 동선을 그리면서 실시간 연결을 진행했습니다.
정 부회장에 앞서서 강원 춘천시의 네이버 데이터센터 ‘각’의 서버실에서 디지털 뉴딜과 관련된 계획을 발표한 한성숙 네이버 대표가 그리 큰 동선을 보여주지는 않았던 것과는 좀 대비가 됐는데요.
정 부회장이 소화한 질의응답 포함 4분이 조금 넘는 생중계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움직임까지 잘 짜여진 발표를 하기 위해 정 부회장은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는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0’에서 정 부회장이 현대차의 ‘항공 모빌리티’를 소개하는 모습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때와 비교해도 훨씬 더 어려운 발표를, 후반에 조금 긴장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잘 소화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 전기차는 컨셉트카, 수소전기차는 양산차
이날 정 부회장이 직접 보여준 차는 총 5대, 모두 전기차와 수소전기차였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수소차는 수소를 내연기관처럼 폭발시켜서 동력을 얻는 방식의 연구도 진행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소탱크 속의 수소를 연료전지에서 산소와 화학 반응시켜서 전기를 얻고 이 전기를 동력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운행합니다. 그래서 수소전기차이지요.
정 부회장이 먼저 보여준 3종류의 차는 전기차 컨셉트카입니다. 컨셉트카는 대량으로 생산해서 판매하는 양산차와는 많이 다릅니다. 향후에 이런 ‘개념’으로 개발하겠다는 방향성을 보여주는 차량입니다.
가장 왼쪽에 있었던 차는 제네시스 ‘에센시아’입니다.
2018년 3월 뉴욕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된 제네시스 최초의 전기차 기반의 GT(Gran Turismo) 컨셉트카입니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센터 터널에 아이(I) 자 형태로 고압 전기 배터리팩을 배치해 전고를 최대한 낮춘 GT 스타일로 완성됐다는 것이 제네시스 측의 설명입니다.
그 옆의 차는 기아자동차의 ‘퓨처론’, 그리고 현대자동차의 ‘프로페시’입니다. 역시 모두 전기차 컨셉트카들입니다.
현대차그룹에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차 내부의 별도 사업부인 ‘제네시스’는 ‘현대차’와는 별개인 고급차 브랜드입니다. 정 부회장은 전기차 영역에서 현대·기아·제네시스, 3개 브랜드의 미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차를 한 대씩 고른 셈입니다.
이어서 소개한 2종의 차는 수소전기차입니다. 익히 잘 알려진 ‘넥쏘’가 먼저 소개됐습니다.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5000대가 팔렸다는 ‘자랑’과 함께였습니다.
이어서 소개된 차는 최근 스위스 수출을 위해 실제로 선적된 바 있는 엑시언트 수소전기트럭이었습니다. 수소전기차는 아직 기아차나 제네시스가 만들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브랜드의 차가 들어올 자리는 없습니다.
이날 소개된 차들에 의미를 좀 부여하자면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기차는 이미 현실이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컨셉트카’를 보여주면서 미래를 얘기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소전기차라고 해서 ‘현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직 전기차에 비해서는 좀 더 미래의 기술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현대차의 기술은 수소전기차 영역에서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앞선 수준입니다. 현대차는 지금의 실물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히 미래를 얘기할 ‘자격’이 있습니다.
● 정의선 “친환경 사업은 현대차그룹 ‘생존’과 관련”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4분이 넘는 시간을 직접 라이브로 중계하기 위해 정 부회장은 만만치 않은 준비를 했을 것 같습니다.
재계 서열 2위인 기업집단을 사실상 총괄하고 있는 정 부회장이 이런 자리에 직접 나서서 정부와 호흡을 맞추고 친환경차 계획을 알리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날 정 부회장이 이날 그 답도 들려줬다고 생각합니다.
이날 정 부회장은 “미래 친환경 사업은 현대차그룹 생존과도 관련이 있고 국가를 위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잘 해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정 부회장이 ‘생존’이라는 단어를 꺼냈다는 점이 최근 정 부회장이 정부는 물론 재계의 다른 기업과도 직접 소통에 나서는 이유의 해답 아닐까 생각합니다. 직접 나서서 열심히 새로운 길을 찾아내지 않으면 생존이 위태로울 정도의 산업 격변기라는 것이지요.
내연기관차 시대에 앞서 있던 경쟁자들을 빠르게 따라잡았던 ‘패스트 팔로워’ 현대차그룹은 대중차 브랜드로는 확실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차량의 품질과 경쟁력을 빠르게 성장시키고 과감한 해외 진출로 생산·판매량을 늘리면서 세계 자동차 업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하지만 빠르게 밀어닥치고 있는 친환경차 시대는 현대차그룹에 너무 큰 도전입니다. “친환경차 시대에 대응해야 하는 것은 어느 자동차 기업이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정 부회장이 ‘생존’이라는 단어를 꺼내야만 한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우선, 한국이 대국이 아니라는 점은 여러 측면에서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얘기가 아니고, 인구가 적고 시장이 작다는 ‘팩트’에 대한 얘기입니다.
친환경차로 전환하는 시기에 세계 각국은 노골적으로 ‘장벽’을 세우고 자국의 기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이미 보여줬지요. 중국은 전기차 배터리의 ‘국적’을 기준으로 보조금을 지급해 자국 전기차 산업을 키웠습니다.
자동차 산업 최강국인 독일이라고 다를까요? 폭스바겐이 저가·보급형 전기차 출시에 나서자 독일 정부는 가격대별로 다른 보조금 정책으로 이를 교묘하게 지원하고 나섰습니다.
현대차그룹이 자랑하는 수소전기차는 좀 다를까요. 시장이 확산돼 세계적으로 ‘이제 팔리는 물건’이 됐을 때 다른 나라들은 과연 가만히 있을까요? 현대차가 기술이 좋으니 많이많이 들여와서 판매하라고 시장을 열어줄까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소 관련 전문가들은 “미국, 유럽, 일본 모두 수소전기차와 관련해 충분한 실력을 갖고 있다. 시장이 열리는 시점에 맞춰서 알아서들 잘 준비할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아직 ‘패스트 팔로워’로 성장 중이었던 현대차로서는 ‘브랜드 파워’도 문제입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전기차건 수소전기차건 시장이 무르익으면 사람들이 ‘현대차’를 선택하겠느냐 ‘벤츠’를 선택하겠느냐?”는 말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위험한 수준의 자율주행 테스트까지를 포함해 ‘테슬라’가 누리고 있는 많은 이점들이 사실 축적된 기술의 힘이 아니라 이미지와 브랜드의 힘 아니냐는 논란까지 생각해보면 현대차는 많은 무기를 손에 쥐지 못한 채로 친환경차 시장에서의 싸움을 시작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어느 측면에서 쳐다봐도, 친환경차 시대에 현대차그룹의 입장은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 기업과 정부의 호흡이 중요한 시기
산업 전반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에는 딱 한 발 앞서는 것이 미래를 결정지을 수도 있습니다. 한발 앞서느냐 못하냐에 따라 ‘죽느냐 사느냐’가 갈라지는 상황에서는 기업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부의 역할도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 부회장이 직접 소통에 나설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특히 친환경차 영역에서는 전기차와 수소전기차 보급을 확산시키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충전 인프라를 갖추고 사용자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접근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최근 한국은 전기차와 수소전기차 영역에서 빠르게 인프라를 늘리고 사용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단순한 ‘홍보’를 넘어서는 적극적인 인프라 구축이 실제로 있었다고 봐야하겠습니다.
국내에서 판매와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규모의 경제’를 만들고 품질 경쟁력을 갖추는 선순환으로 들어가야 세계무대에서의 경쟁력도 생길 수 있습니다.
만만치 않은 여건이지만 그래도 정부도 이런 상황을 잘 고민하면서 친환경차 정책을 펼치려 노력하고 있고 현대차그룹은 여기에 적극 호응하고 있는 양상입니다.
지금 현대차그룹에서는 전기차나 수소전기차가 ‘수익’에 도움이 되는 차들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손해’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래를 위해 크게 남는 것 없이 만들어서 팔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정부는 세금으로 친환경차 보급을 돕고 기업은 내연기관차에서 얻은 수익으로 친환경차 생산에 투자하고… 어찌 보면 정부도 기업도,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열심히 씨를 뿌리고 있는 때일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어느 곳에, 얼마나 씨를 뿌려야 큰 수확을 거둘 수 있을지를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런 예측도 쉽지만은 않겠지요. 그래도 정부도 기업도,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잘 격려하고 또 응원해도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정 부회장이 직접 얘기한 것처럼,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자리와 경제 성장 모두의 측면에서 “국가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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