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1월 전세 계약 만기일을 앞두고 있는 김모 씨(58)는 “집주인이 전세 가격을 올려달라고 연락이 올까봐 노심초사 중”이라고 말했다. 김 씨가 서울 서대문구에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전용면적 120㎡ 아파트는 2년 전보다 1억5000만 원 가량 올랐다. 김 씨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이사할만한 곳을 알아보는데, 전세 매물이 씨가 말라 그 마저도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장모 씨(35)는 임대차 3법 시행이 빨라질 수 있다는 소식에 고민에 빠졌다. 지난해 전세를 끼고 집을 산 뒤 계약 기간을 내년 2월까지 연장해줬는데, 현재 장 씨가 세 들어 있는 전셋집은 이미 6년째 살고 있어 계약 연장이 안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장 씨는 “전세는 매물이 거의 없고 대부분 반전세라 매입한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임대차 3법이 시행되면 내가 들어가기 힘들어지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장마, 휴가 등으로 이사 수요가 적은 임대차 시장 비수기에도 서울 등 수도권의 전세 가격이 높은 상승세를 보이면서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대책이 세입자의 주거 불안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대차 3법까지 국회를 통과할 경우 하반기 ‘전세 대란’이 우려되지만 정부는 임대차 3법 외의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26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서울 서초구 잠원동 래미안신반포팰리스 전용면적 84㎡는 이달 16일 16억 원에 전세 거래됐다. 올해 5월 같은 면적이 13억5000만 원에 거래됐었지만 두 달 사이 2억5000만 원이 더 올랐다. 강북도 마찬가지다. 서울 마포구 용강동 e편한세상마포리버파크 전용면적 60㎡는 지난달 13일 6억6500만 원에 거래됐으나 이달 2일엔 7억5000만 원에 거래됐다. 2주 사이 1억 원 가까이 오른 셈이다.
부동산 업계에선 전세가격이 이처럼 빠르게 치솟는 이유로 6·17 부동산대책과 7·10 부동산대책으로 인한 전세 매물 부족을 꼽는다. 정부는 두 대책을 통해 재건축 단지에서 조합원 분양을 받으려면 2년 실거주하도록 하고, 주택담보대출을 새로 받아 집을 매매할 경우 6개월 내에 전입하도록 하는 등 실거주 요건을 강화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정부 규제로 세입자를 내보내고 들어가 살겠다는 분위기가 집주인 사이에서 강해졌다”고 말했다.
이달 29일부터 본격 시행되는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역시 전세 가격을 끌어 올리는 요인이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가 대출, 세제 등을 조이면서 기존에 매매로 넘어갈 사람도 전세에 눌러앉는 상황”이라며 “분양가상한제가 시행되면 낮은 분양가를 기대하는 대기수요는 더 늘어나고, 중장기적으로 공급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국책은행인 한국은행 역시 이날 미래통합당 유경준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서 전셋값이 더 오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은은 “임대인의 월세 선호 현상 등으로 전세 공급은 감소하는 반면 전세 수요는 금리 하락에 따른 전세자금대출 여력 증가, 신도시 공급 주택에 대한 청약 대기 등으로 높은 수준을 지속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선 정부와 여당이 이달 중 입법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임대차3법(전월세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 전월세신고제) 역시 전세 대란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고 본다. 임대차3법 도입을 앞두고 임대인들이 전세 가격을 미리 올리거나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당이 임대차 3법 관련 입법을 경쟁적으로 하는 상황에서 도입 시기, 방식, 예외 인정 범위 등은 명확하지 않아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전세 가격 불안이 계속되며 임대차 3법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국토교통부는 이날 보도 설명자료를 내고 “집주인이 계약갱신 시점에 해당 주택에서 직접 거주하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제약 없이 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 “현재 존속중인 계약에도 임대차 3법을 적용할 공익상 필요가 상당히 높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는 기존 발의안에 포함된 큰 원칙을 재차 밝힌 것일 뿐 실수요자들의 혼란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부동산 전문가는 “임대차 3법 도입은 전월세 시장을 안정시키는 대책이 아니라 4~6년에 한 번씩 전세 가격이 대폭 오르도록 하는 시장 불안을 키우는 제도”라며 “정부가 구체적인 방침 없이 규제를 예고해 불안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