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 일변도 이미지에서 벗어나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노동운동을 실천해야 한다.” “조합원은 배부른 귀족노동자, 안티현대로 낙인찍히는 불명예를 안았다.”
올해 현대차 노조(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금속노조 현대차지부)가 내부 소식지에서 내놓은 얘기입니다. 노조 밖의 많은 사람들이 했던 말들입니다만, 노조 스스로 꺼냈다는 점에서 눈길이 갑니다.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으로 끊임없이 임금을 인상하는 모습 때문에 현대차 조합원은 ‘귀족노동자’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됐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반감의 대상이 됐고 요즘은 노조와 별 관계가 없는 현대차 기사에도 노조를 비판하는 악플이 줄줄이 달립니다. 최근의 와이파이 차단 논란과 조기 퇴근자 해고 조치 등이 알려지면서 비판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습니다.
이런 문제를 지금이라도 노조가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로 보입니다. 자동차는 기업을 상대로 파는 물건이 아니고 소비자 개개인에게 파는 물건입니다. 현대차 노조가 회사의 이미지를 깎아먹으면 판매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차 노조는 “고객이 없으면 물량도 고용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에서 출발하자”는 얘기도 했습니다. 완성차 공장에서는 생산 물량이 곧 고용이고 돈입니다. 생산 물량이 많아야 일자리를 지킬 수 있고 주말 특근 등을 통해서 당당하게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역사회 그리고 국민들로부터 좀 더 사랑받는 회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자, 는 노조의 목소리는 당연한 일에 가깝습니다.
노조 집행부는 기존의 노조 활동이 2020년 한국 사회에서 뚜렷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기도 합니다.
초기의 ‘전투적 조합주의’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기금 사태를 계기로 ‘패배’한 것으로 봅니다. 정리해고를 포함한 구조조정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후에는 ‘실리적 조합주의’를 내걸어 임금·처우 개선 등에서 효력을 발휘했지만 사회적으로는 노조가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출했습니다. 이른바 ‘귀족노조’ 프레임을 고착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최근 현대차의 품질 문제에 노조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이런 고민들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제네시스 GV80의 디젤 엔진 문제 같은 일은 설계상의 문제로 봐야겠지만 흠집, 도장 불량, 단차 문제 등은 조합원들이 현장에서 일할 때 더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히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노동 최소화, 보상 최대화… “제국주의 노조” 지적도
까다로운 고객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조합원들도 더 노력하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를 노조가 꺼낸 것이 2020년이라는 점은 서글픈 대목입니다.
현대차 노조의 문제는 뿌리가 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돼 왔습니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2017년 ‘가 보지 않은 길’이라는 책을 통해 현대차를 분석했습니다.
현대차의 성장 스토리를 다룬 이 책은 현대차 작업장의 ‘도덕적 해이’를 이야기했습니다. 당시에는 밤 12시 30분이었던 2직 퇴근자의 조기퇴근 갈등 문제가 언급됐고 미리 작업을 끝내고 노는 ‘올려치기’ ‘밀어치기’ 같은 관행이 얘기됐습니다.
와이파이가 됐건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가 됐건 간에 근무 중에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는 일이 있다면 이런 관행이 그 기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의 비판은 현대차는 노동은 최소화하되 보상은 극대화하는 생산기지가 됐다는 것으로도 요약됩니다. 송 교수는 “노동 최소화를 위한 작은 흥정과 근무태만이 발생하는 작업현장에서 ‘열정’(passion)은 꿈같은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이를 바라보자면, 도대체 무슨 마음가짐으로 만든 차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더불어서 뼈아픈 대목은 ‘제국주의’라는 비판입니다. 현대차 노조의 ‘정직원’ 근로자들이 협력업체 그리고 해외공장의 생산성에 편승해서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송 교수는 “1970년대 ‘제국의 하청’에서 벗어난 현대차그룹 노조는 이제 제국 노조(imperial union)로 질주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체 반성이 필요하다”고 썼습니다.
현대차는 글로벌 완성차 업계에서 유래 없는 성장으로 주목받았고 지금의 위상 역시 자랑스러운 수준입니다. 말 그대로 불모지에서 이런 성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많은 근로자들이 땀과 눈물을 쏟았지만 어느 순간 이 근로자들은 ‘귀족 노동자’가 돼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파업을 무기로 임금인상에 열을 올렸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협력업체 근로자의 몫을 갉아먹고 있다는 비판도 여전합니다.
● 노조의 변화, 내부 호응 얻을지가 관건
이런 상황에서 이번 현대차 노조 집행부가 시도하는 변화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지만 앞길이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집행부에 정말로 변화 의지가 있느냐도 문제지만 집행부가 모든 것을 이끌고 나갈 수 없는 구조적인 제약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노조는 조합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곳입니다. 노동운동의 방식을 바꾸고 품질개선에 나서자는 주장은 “노조가 회사 경영에 협조하지 말고 조합원의 권익 보호에 더 집중하라”는 내부 반발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울산공장 내부에서는 이미 “노조 집행부는 ‘경영’을 하지 말고 ‘집행’을 하라”는 비판 대자보가 나붙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현대차에는 다양한 노동운동 계파가 있고 선거를 앞두고 이합집산하면서 집행부를 선출합니다. 2년 임기의 노조가 큰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셈입니다.
조합원 수가 가장 많은 울산공장의 경우 노조 집행부도 중요하지만 각 공장을 대표하는 사업부 대표와 대의원 등의 발언력도 상당합니다. 노조 집행부가 ‘변화’를 얘기한다고 해서 꼭 그렇게 흘러가리라는 보장이 없는 셈입니다.
결국 노조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 이런 목소리를 현장의 근로자들이 수용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사실, 현대차 노조는 노동력이 줄어드는 전기차로의 전환 등을 앞두고 일자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양보할 부분은 양보하고 지켜낼 부분은 지켜내자는 전략을 펼치는 것이 맞을 수도 있는 처지입니다. 이런 부분까지 맞물려서 현대차와 노조는 앞으로 복잡한 협상을 이어가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 조기퇴근, 근무 중 낚시… ‘비정상의 정상화’ 가능할까
현대차 노조가 어느 정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계속 지켜봐야 할 부분입니다.
올해 임금협상에서 현대차 노조가 어떤 태도를 보여줄지 등이 앞으로 이슈가 되겠습니다만, 저는 최근 회사 측에서 그동안의 잘못된 근무 관행에 연이어 철퇴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 관심이 많이 갑니다.
현대차는 최근 상습적인 조기퇴근과 관련해 1명을 해고 조치하고 300명가량에게 감봉 등의 무더기 징계를 내렸습니다. 야간 근무 중에 근무지를 이탈해서 낚시를 한 직원이 정직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시끄러웠던 공장 내 ‘와이파이’는 이미 차단된 상황입니다. 회사 측이 잘못된 근무 관행을 바로 잡겠다고 나서는 모습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노조와 직원들이 임금을 올려달라고 투쟁하는 것은 권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도 다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앞세우는 것은 너무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는 것은 현대차 노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로도 보입니다. 설혹 고임금을 받을 지라도, 근로자들이 그에 걸맞는 정성을 들여서 차를 만든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면 노사 모두 이미지를 크게 개선시킬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관행과 무관하게 자신의 몫을 묵묵히 하고 있는 근로자들을 위해서도 변화는 필요해 보입니다.
지난해 낮에 목격한 조기퇴근의 모습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밤까지 기다려서 다시 조기퇴근의 모습을 확인하고 영상으로도 찍었습니다.
밤 12시 30분이 넘어서 정문을 나서던 한 근로자는 “우리도 그런 모습이 부끄럽다. 다만, 모두 그렇다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처럼 퇴근 시간이 되면 작업을 마무리 짓고 작업장을 정돈한 뒤에 퇴근하는 근로자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목소리에 비춰보면 “내 할 일은 다 했으니 퇴근 시간 맞춰서 정문을 통과하겠다”는 모습만큼은 정말 사라져야 할 관행일 수 있습니다.
근무 시간에 내 일 다 끝냈다면서 작업장을 한참 벗어난 곳까지 가서 낚시를 할 수 있는 회사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낚시하다 적발된 직원의 징계 소식에는 다른 직원들도 혀를 끌끌 찼습니다.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 밖에 알려질까 겁난다는 것입니다.
● 첫 전기차 전용라인 공사… 노동운동 패러다임도 바뀔까
현대차 울산공장은 이번주 1주일 간의 여름 휴가를 가졌습니다. 다음주부터는 각 공장별 일정에 따라서 다시 조업을 재개합니다.
울산공장에는 엔진·변속기 공장을 제외하고도 1~5공장이 있습니다. 연간 150만 대를 넘는 차를 생산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동차 공장입니다.
지난달 돌아본 울산공장은 생각보다 컸고, 또 생각보다 비좁았습니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었지만 그런 넓은 부지에도 너무 많은 공장과 시설이 밀집돼 있어서 내부가 좁게 느껴졌습니다.
울산공장은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이름을 딴 아산로를 옆에 끼고 있습니다. 1968년 첫 공장이 완공됐으니 공장의 역사는 5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울산1공장 2라인은 이달 내내 전기차 전용 라인으로 바꾸는 공사를 진행합니다. 현대차의 첫 전기차 전용 생산라인입니다.
현대차가 내연기관차 기술을 따라잡느라 보냈던 반세기는 비교적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제 전기차 시대를 준비하는 울산공장이, 지난 기간 동안 축적한 허물을 좀 벗어던질 수 있을지, 관심이 가는 요즘입니다.
현대차 노조가 지난 2월 소식지에서 밝힌 얘기로 오늘의 휴일차담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1987년 정권과 자본의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기 위해 노조를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조합원은 배부른 귀족노동자, 안티현대로 낙인찍히는 불명예를 안았다. 현대차 조합원에 대한 보수언론의 마녀사냥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제 노동운동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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