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서 ‘여공’이란 말 쓰지 마라” 이건희 회장의 지시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이건희 삼성회장 타계]주변 사람들 눈에 비친 이건희
“남녀 차별 타파… ‘여공’ 호칭 못쓰게 하고 호봉체계 단일화”

“삼성과 인연을 맺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도록 하는 게 내 꿈입니다. 그렇게 기원해주고 싶어요.”

2002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 직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이경숙 전 숙명여대 총장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고 한다. 이 회장 부부가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초대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된 이 전 총장을 승지원으로 초청한 자리였다. 이 전 총장은 27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3시간 식사 자리에서 이 회장은 ‘인재를 길러야 사회도 잘되고 나라도 잘된다’고 강조했다. 많은 기업인을 만나봤지만 그렇게 크게 사고하고 나라를 위해 고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26일 빈소를 찾아 영정 앞에서 ‘우리나라가 일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현실로 만들어줘 고맙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드렸다”고 말했다.

○ “한번 맡기면 간섭하지 않는다”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의 임기는 다른 회사보다 긴 편이다.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1997년부터 2008년까지 11년간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지냈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은 “삼성 CEO들에게 ‘오너십’을 심어줬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의 비서실장이었던 현명관 전 마사회장은 “다른 회사 같으면 2억 원 쓸 때도 회장에게 보고했다면 삼성 CEO들은 10억∼20억 원은 물론이고 100억∼200억 원 범위의 사업을 할 때도 회장에게 일일이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프로젝트의 기간과 내용 등 큰 줄기는 논의해야 했다. 집행 단계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CEO 책임이었다.

○“도쿄에 까마귀가 몇 마리인가?”

이 회장은 듣는 사람이었다. 이마를 찌푸릴 뿐 불호령을 내리는 일도 드물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삼성 임원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이 회장의 질문이었다.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지낸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갑자기 ‘도쿄에 까마귀가 몇 마리인 줄 아느냐’ ‘휴대전화를 반도체 없이 진공관 등으로 만들면 크기가 얼마나 되는 줄 아느냐’고 물으셨다”고 말했다. 질문의 배경을 알 수 없어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이 회장은 “반도체가 없다면 휴대전화 크기는 10층 건물 규모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진 전 장관은 “우리가 설마 하며 계산해 보니 그 말이 맞아 깜짝 놀랐다”고 했다.

사업에 대한 질문은 매서웠다. 하나에 대해 최소 5번 이상, 끝까지 파고들어 가야 직성이 풀렸다. 질문은 미래를 보는 혜안으로 이어졌다. 2011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에 삼성의 성공 방식을 담은 논문이 실렸다. 논문의 공동저자인 송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 회장은 1990년대에 이미 연구개발(R&D), 디자인, 브랜드 마케팅 투자를 강조했다. 당시만 해도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18년여 근무한 김경원 세종대 부총장은 “20년 전부터 소프트웨어 인재를 1만 명 양성하라고 했는데 다들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구글이 등장한 이후 ‘소프트웨어 키우라 했더니 그동안 뭐 했나’라는 질책을 듣고서야 이해했다”고 말했다.

○ “한국이 잘돼야 삼성이 잘된다”

1993년 6월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증권실장이던 김 부총장은 연초부터 이직용 이력서를 쓰고 있었다. 선물로 받은 삼성 제품이 불량인 경우가 많아 ‘이런 불량품을 만드는 회사가 무슨 미래가 있겠나’ 싶었다고 했다.

마침 이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하고 각 계열사에 ‘미션’을 줬다. 연구소에 내린 지시는 이것이었다. “대한민국이 잘돼야 삼성이 잘됩니다. 이제부터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이 잘되는 길을 연구해 주세요.”

김 부총장은 “신경영은 삼성전자에는 불량률을 낮추라는 지시로, 삼성경제연구소에는 한국 발전 방안을 연구하라는 명령으로 전달된 한국 사회의 종합 발전 방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날 이후 김 부총장은 이력서 쓰기를 그만뒀다.

○ “여성 키우지 않는 것은 낭비”

이 회장은 차별을 싫어했다. 학교나 성별을 이유로 필요한 사람을 쓰지 않는 것을 ‘낭비’로 여겼다. 1990년대에 이미 “지구의 절반은 여성인데, 어떻게 절반 없이 세계 최고의 기업을 키우느냐”며 여성과 남성 호봉 체계를 단일화할 것을 지시했다.

이경숙 전 총장은 “일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을 잘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1990년대 초부터 여성 인력을 채용하고, 임원이 돼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여성 인재를 중시했다”고 말했다.

삼성에 ‘여공’이란 말을 쓰지 못하게 한 것도 이 회장이었다.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는 직장 내 ‘에티켓을 살리자’는 캠페인도 들어있었다. 서로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으면 ‘신경영 사무국’에 신고하라고 했다. 당시 입사한 여성 직원들 중 현재 삼성의 임원으로 큰 사람들이 많다.

○새벽회의-밤샘토론 즐긴 체력

이 회장은 새벽회의, 밤샘토론을 종종 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았다. 이 때문에 자택은 밤 또는 새벽에 임원들로 북적이기 일쑤였다. 현 전 회장은 “신경영 추진 당시 고민이 깊어지면 주요 임원을 불러 새벽까지 대화를 하기도 했다”며 “그럴 때면 이 회장도 아침이나 낮까지 잠을 잤다. (여느 경영인처럼)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가진 경영인은 아니었지만 항상 에너지가 넘쳤다”고 말했다.

그 에너지는 평소에 즐기던 운동에서 나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모임 등 공식 행사뿐 아니라 해외 재계 인사들과 친목모임이 있을 때 골프를 즐겼다. 작은 체구지만 비거리도 짧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크게 뒤처지지 않는 실력을 자랑했다. 승마와 스키도 이 회장의 취미였다. 술은 즐기지 않았다. 와인 한두 잔이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김현수 kimhs@donga.com·서동일·홍석호 기자

#남녀 차별 타파#여공#호봉체계#단일화#이건희#삼성회장#타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