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한 달에 10만 원도 못 부칩니까? (돈 갚는다는) 전화 올까 봐 6월까지 ‘011’ 휴대전화 번호도 안 바꾸고 그대로 갖고 있었는데….”
지난달 27일 오전 11시 서울회생법원 8호 법정. 돈을 빌려준 사람과 받아야 할 사람들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이날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나와 맨 앞줄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김모 씨(43)도 파산면책으로 가는 마지막 절차를 밟고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도 치솟는 집값과 증시로 자산이 곱절로 불어난 사람들이 있지만 막다른 길 위에 선 김 씨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회생법원, 신용회복위원회 등에서 그들을 만났다.
○ 재기 의지마저 앗아갔다… 파산 직행하는 사람들
김 씨는 2011년 식료품 회사에서 일하다가 김치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부진한 사업을 만회하려고 지게차 임대업도 해봤지만 빚은 7억6800만 원으로 불었다. 2018년 11월 개인회생을 신청했지만 이듬해 3월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재기 희망이 사라지자 지난해 7월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코로나19 위기로 돈을 벌 길마저 막막해진 김 씨가 할 수 있는 건 법원의 파산면책 선고가 나길 기다리는 일뿐이다.
법원통계월보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전국 법원에 접수된 개인파산 신청은 총 4만1257건으로 전년 같은 기간 3만7954건보다 3303건 늘었다. 2017년 이후 최대 규모다. 코로나19 1차 대유행 이후인 올해 6, 7월에는 파산 신청이 4890여 건으로 크게 증가했다. 회생법원의 한 판사는 “파산 신청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외생 변수가 외환위기, 세계 금융위기에서 이번엔 코로나19로 바뀐 것으로 보면 된다”고 했다.
코로나19 사태가 만든 소득절벽으로 파산으로 직행하는 이도 많다.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은 안정적인 소득 유무에 따라 갈린다. 개인이 회생을 신청해도 법원이 안정적 수입이 없다고 판단하면 파산 절차를 밟게 할 수 있다. 회생법원의 한 판사는 “최근 무급휴가 등이 장기화되면서 ‘끝이 안 보이는데 시간을 계속 끌 수 없다’며 3년 이상 걸리는 회생 대신 1년여 만에 끝나는 파산면책 신청으로 직행하는 채무자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 “자다가도 억울해 눈물이 났다”…부채의 수렁
“제가 원래 평범한 중산층이었는데….” 하루 평균 90명이 방문하는 서울 중구 신용회복위원회 서울중앙지부에서 지난달 26일 만난 원모 씨(65·여)도 파산 신청을 진행하고 있었다. 원 씨는 2007년 “엔화 대출을 해주겠다”는 재개발 시행사의 꾐에 넘어가 5억 원을 빌리면서 빚의 늪에 빠졌다. 시행사가 부도나고 갚아야 할 대출액과 이자는 순식간에 12억 원으로 불었다. 2014년경 갖고 있던 서울 동대문구의 다세대주택마저 경매로 넘겼다.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주고 나니 살 길이 막막했다.
원 씨는 귀농을 결심했다. 하지만 귀농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나머지 원금과 이자 4억 원을 갚으라”는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은행이 넘긴 채권을 받아내려는 자산유동화 회사의 독촉이었다. 통장으로 월급 압류가 들어왔다.
“자다가도 약이 올라 눈물이 났다”던 그는 변호사의 도움으로 소송을 통해 갚아야 할 빚을 1억 원으로 낮췄다. 그 와중에 추심회사보다 더 무서운 코로나19가 덮쳤다. 식당에 손님이 끊기면서 일하는 시간은 하루 12시간에서 10시간으로, 다시 8시간에서 5시간으로 줄었다. 일당까지 줄자 더 버틸 힘이 없었다. “파산까지 두 달 걸린다고 하는데 차라리 홀가분하다.” 원 씨는 파산 신청서류를 앞에 두고 시선을 떨궜다.
○ 정부 지원금 아랫목으로 흘렀다
정부가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해 소상공인, 중소기업 등에 푼 금융 지원 규모만 250조 원에 이른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인데 정부 지원금에 따라붙는 조건들 앞에서 좌절하는 사례도 다반사다. 식당을 운영하는 이명숙 씨(52·여)는 주변 공장이 문을 닫고 단골손님이 줄면서 경영난을 겪자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을 위한 대출 지원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5년 전 부가세 2300만 원을 연체한 기록이 발목을 잡았다. 이 씨는 “빚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3년 전 파산 신청을 했다. 카드 빚이나 저축은행 빚들은 탕감됐지만 밀린 세금은 그대로 남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결국 대부업체를 찾았고 사채까지 끌어다 쓰는 바람에 다시 8000만 원의 빚을 졌다. 또 다른 사채를 끌어와 매달 원리금 700만 원을 갚는 불안한 돌려 막기를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격차는 불안, 우울감을 키우고 ‘건강 불평등’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취업 등 경제활동이나 소득수준이 건강에도 차별적인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서울대병원 윤영호 교수팀은 10월 ‘퀄리티 오브 라이프 리서치’에 전국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건강과 소득, 직업 유무가 우울증·자살충동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결과를 게재했다. 조사 결과 월 소득 200만 원 미만인 사람이 200만 원 이상인 사람에 비해 자살충동이 6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씨의 사례처럼 코로나19 위기를 넘기면 재기가 가능한 사람들이 빚의 늪에 빠지지 않게 ‘피할 수 있는 파산’을 피하게 돕는 더 정교한 대책도 필요하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소득절벽으로 한계에 몰린 사람들에겐 당장은 실물 지원이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서도 “정부가 파산자나 한계가계 구성원이 삶의 활로를 모색하고 재기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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