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개 ‘규제의 자물쇠’ 풀었지만 신사업 ‘장벽’ 여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22일 03시 00분


상의 ‘민간 샌드박스’ 출범 7개월

하나의 주방을 여러 업체가 같이 쓰며 사업비용을 아낄 수 있는 공유주방 사업은 한국에선 ‘불법’이었다. 해외에서는 활성화돼 있지만 국내에선 식품위생법에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교차오염으로 인한 식중독 방지를 위해 ‘1사업자 1주방’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공유주방에서 기회를 엿본 김기웅 위쿡 대표는 포기할 수 없어 지난해 5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주관한 스타트업 모임을 찾아 하소연했다. 이때부터 박 회장과 대한상의는 ‘공유주방 규제 풀기’에 나섰고, 지난해 7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 심의위원회를 통과했다. 당시 박 회장은 서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을 방문해 “공무원 한 분 한 분 업어 드리고 싶다”며 감사를 표했다. 이어 공유주방은 이달 초 식품위생법 개정을 통해 ‘합법화’에 성공했다.

김 대표는 “현재 12개 지점에서 511개 팀이 식음료(F&B) 사업에 진출했다”며 “공유주방을 넘어 브랜드 마케팅 등 외식 스타트업을 키우는 플랫폼을 꿈꿀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21일 대한상의에 따르면 5월 대한상의 ‘민간 샌드박스 지원센터’가 출범한 이후 현재까지 총 62건의 과제가 샌드박스를 통과했다. 대한상의는 샌드박스 통과를 위한 측면 지원을 넘어 자체 지원센터를 만들어 전면 지원에 나섰다. 이를 통해 재외국민 원격의료부터 공유미용실과 비대면 통신 가입 애플리케이션(앱)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불합리한 법과 제도를 우회해 사업화의 길이 열렸다.

샌드박스는 혁신 제품과 서비스의 시장 출시를 불합리하게 가로막는 규제를 유예하거나 면제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영국 미국 일본 등에서는 정부와 금융당국을 중심으로 샌드박스가 운영되고 있지만, 민관 합동 지원기구를 마련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박 회장은 “(국내에선)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창의성에 한계를 가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며 “아이디어가 떠올라 뭔가 해보려 해도 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박 회장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샌드박스를 통해 사업화를 하더라도 정작 법령 개정이 되지 않으면 사업이 도중에 중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 개정 전까지는 샌드박스를 신청한 업체들에 한해서만 규제를 우회할 수 있다.

박 회장과 대한상의 실무진은 이런 점을 방지하기 위해 법제화를 하고자 끊임없이 국회 문을 두드렸다. 박 회장은 지난해와 올해 총 13번 국회를 찾았다. 의원실 문을 두드리며 국회 안에서만 하루 최대 7km를 걷기도 했다. 그동안 개정된 법률은 11건이고, 규제 소관 부처가 먼저 나서 유권해석을 내리거나 법령 개정을 하는 ‘적극행정’도 17건이나 있었다. 위쿡도 이런 노력의 혜택을 입은 것이다.

법제화의 수혜를 본 또 다른 사례는 폐배터리 재활용 사업이다. 기존 제도는 전기차 폐배터리를 지자체에 의무적으로 반납하도록 돼 있었다. 현재 폐배터리는 연간 100개 정도 배출되는 수준이지만 전기차 수가 늘면 5년 후엔 연간 1만 개씩 쏟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은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데 폐배터리를 활용할 길은 막혀 있었던 것이다. 김창인 에스아이셀 대표는 “관련법이 통과되면서 일석삼조 효과를 볼 수 있게 됐다”며 “2050년 600조 원 규모의 폐배터리 시장 산업화는 물론이고 환경 보호와 배터리 원료 수입 절감이라는 통상 측면에도 기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가사근로자법’ 제정 등은 남은 과제다. 가사근로자 직고용 플랫폼을 하려던 홈스토리생활은 11월 샌드박스를 통해 사업화의 길이 열렸지만, 관련법 제정 논의는 10년째 국회에서 멈춰 있다. 현재 국내 가사근로자는 30만 명에 달하지만 최저임금, 연차휴가, 퇴직금 등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나 종사자, 심지어 업체까지 법안 통과를 원하고 있지만 국회 무관심이 큰 탓이다. 홈스토리 측은 법이 통과될 경우 더 적극적으로 중장년 가사도우미를 고용한다는 방침이다.

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대한상의#민간 샌드박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