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신화 만들자” 이재용 새해 첫 행보는 ‘동행’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5일 03시 00분


[재계 세대교체, 디지털 총수 시대] <2>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사업 시스템반도체 공장
협력사 대표들과 함께 찾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은 새해 첫 근무일인 4일 경기 평택 반도체 공장을 찾아 “협력회사, 학계, 연구기관이 협력해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어 시스템반도체에서도 신화를 만들자”며 “함께하면 미래를 활짝 열 수 있다”고 말했다.

평택 2공장은 지난해 일부 가동을 시작한 삼성의 반도체 전초 기지다. 메모리반도체뿐 아니라 삼성의 신사업인 초미세 시스템반도체 제품을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파운드리 라인이 갖춰져 있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133조 원을 투자해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날 평택 2공장에선 국내 협력업체인 원익IPS가 국산화에 성공한 파운드리(위탁생산) 설비를 들여오는 반입식이 열렸다. 작업복과 방진복 차림의 이 부회장은 이용한 원익IPS 회장, 박경수 피에스케이 부회장, 이우경 ASML코리아 대표, 이준혁 동진쎄미켐 부회장, 정지완 솔브레인 회장 등 협력회사 대표와 함께 행사에 참석한 뒤 협력을 논의했다. 또 반도체부문 사장단과 중장기 전략을 점검했다.

이날은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 별세 이후 첫 현장 경영에 나선 날이자 새해 첫 일정이다. 재계에선 ‘뉴 삼성’으로 ‘승어부(勝於父·아버지보다 나음)’를 하겠다는 이 부회장이 미래 신사업인 ‘시스템반도체’와 협력업체와의 ‘동행’을 키워드로 내세운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삼성 미래는 초일류 테크 기업”… 이재용, 주력사업 세대교체 가속

새해 첫 행보, 평택 반도체 사업장 방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4일 경기 평택2공장을 찾았다. 이 부회장이 극자외선(EUV) 전용 라인의 D램과 시스템반도체 생산 라인을 점검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새해 첫 행보, 평택 반도체 사업장 방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4일 경기 평택2공장을 찾았다. 이 부회장이 극자외선(EUV) 전용 라인의 D램과 시스템반도체 생산 라인을 점검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53)은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 박사과정을 마친 후 2000년 귀국했다. 미국에선 ‘닷컴 붐’이 일어날 때였다. 정보기술(IT) 기업이 한순간에 수백 배 성장하거나,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2007년 삼성의 최고고객책임자(CCO) 전무로 승진한 뒤 첫 출장지는 미국 실리콘밸리였다. 애플 아이폰이 처음 출시된 해다. 이 부회장은 CCO로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 창업주뿐 아니라 HP,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만나 세계 테크 시장의 흐름을 배우고 성장 속도를 체화했다.

이 부회장은 이때부터 “삼성도 죽기 살기로 1등 할 수 있는 분야에 매달려야 한다”고 강조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IT 기업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글로벌 테크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주력 사업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봤다. 이것이 2014년 화학계열사 등 비주력 사업을 개편한 단초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이 부회장이 총수에 오른 뒤 삼성 주력 사업의 세대교체가 가속화하고 있다. 세대교체의 주인공은 시스템반도체와 더불어 △인공지능(AI) △5세대(5G) 이동통신 △바이오 △전장(電裝) 등 4대 신사업 분야다. 4일 이 부회장이 새해 첫 행보로 시스템반도체 전초기지를 찾은 것도 주력 사업 세대교체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 부회장은 2030년 삼성을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로 만들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추진 중이다.

이 부회장이 삼성의 변화 속도를 높일 수 있는 힘은 글로벌 기술기업 리더, 첨단기술 분야 석학 등으로 구성된 인적 네트워크에서 나온다. 이 부회장은 2018년 경영 복귀 45일 만인 그해 3월 유럽과 캐나다로 출장을 떠났다. 하루가 다르게 격변하는 AI 현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게 목적이었다. 이때 세계적인 AI 석학 서배스천 승 프린스턴대 교수를 비롯해 다양한 인사를 만나며 AI 등 4대 신사업 투자를 발표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삼성의 미래를 초일류 테크 기업으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기술 트렌드를 읽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쌓기 위해 해외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삼성전자의 굵직한 사업 성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해 9월 세계 1위 통신사업자 미국 버라이즌과 5G 장비 공급 계약을 맺은 것이 대표적이다. 계약금액만 8조 원에 이르는 ‘빅딜’의 바탕에는 이 부회장과 한스 베스트베리 버라이즌 CEO와의 인연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은 베스트베리 CEO가 스웨덴 장비업체 에릭슨에 CEO로 있을 때부터 자주 만나온 사이다. 이 부회장은 계약 전 여러 차례 화상통화를 하며 적극적 영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의 일본, 인도 인맥도 탄탄하다. 일본 경제계를 대표하는 소프트뱅크 창업자 손정의 회장과는 막역한 사이다. 부친 이 회장이 쌓아온 ‘이건희와 일본 친구들(LJF)’과 인연도 이어오고 있다. LJF에는 교세라, 무라타제작소, TDK 등 일본 대표 전자부품 회사 사장단이 포함돼 있다.

이 부회장은 인도 최대 통신기업인 릴라이언스 지오와도 인연이 깊다. 이런 인연 덕분에 릴라이언스 지오는 현재 전국 롱텀에볼루션(LTE) 네트워크에 100% 삼성 통신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사업 현장을 가장 많이 찾는 경영인으로도 꼽힌다. 예고 없이 직원 구내식당에 들러 직원들과 셀카를 찍는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미중 갈등, 코로나19 등 경영 불확실성이 커진 지난해 공개된 현장 경영 행보만 20여 차례에 달했다. 반도체 사업장이 7곳으로 가장 많았지만 ‘워킹맘 간담회’처럼 직원들의 어려움을 듣기 위한 행보도 적지 않았다.

코로나19 와중에도 중국 시안(西安) 반도체 사업장(5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10월), 베트남 연구개발(R&D)센터(10월) 등 현장을 누볐다.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은 코로나19 사태 후 중국을 찾은 첫 글로벌 기업인이자, 주요 대기업 경영진 중 코로나19 검사를 가장 많이 받은 기업인으로 꼽혔다.

이 부회장의 현장 경영 중에는 스타트업을 창업하려는 사내 임직원과의 만남이 빠지지 않는다. 이 부회장 본인도 2000년대 초 핀테크 등에 사재를 털어 벤처 사업에 도전한 적이 있다. 지난해 7월 사내 벤처 지원 프로그램인 ‘C랩’을 찾아 “오직 미래만 보고 새로운 것만 생각해야 한다”며 “미래는 꿈에서 시작된다. 지치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성은 2012년부터 미국 실리콘밸리 일대에 ‘삼성넥스트’ ‘삼성전략혁신센터’를 세워 현지 스타트업 투자에도 나서고 있다. 삼성넥스트 등은 삼성을 하드웨어 업체에서 소프트웨어 기반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전초 기지로 꼽힌다.

“벤처-中企와 협력, 건강한 산업생태계 육성”

이재용 새해 첫 행보는 ‘동행’
올해 삼성 입사 30년 되는 해
“새로운 삼성으로… 함께 미래 열자”
글로벌 브랜드 가치 업그레이드 주력

“이병철 회장이 창업을,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통해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웠다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속가능한 초일류 기업’을 그리고 있다.”

4일 이 부회장이 협력사 대표들과 함께 경기 평택 반도체 사업장을 찾은 것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삼성의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글로벌 리딩 테크기업에 더해 협력사, 고객, 사회와 함께하는 ‘동행’과 ‘건강한 생태계’라는 비전을 목표로 한다는 의미다. 이 부회장은 이날 현장에서 “2021년 새해를 맞아 새로운 삼성으로 도약하자. 함께하면 미래를 활짝 열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이 부회장은 지난해 12월 30일 결심 공판에서 “경쟁과 성장은 기본이고, 제가 꿈꾸는 승어부(勝於父·아버지보다 나음)는 더 큰 의미를 담아야 한다. 학계, 벤처업계, 중소기업계 등과 유기적으로 협력해서 우리 산업생태계가 더욱 건강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사회와 함께하는 건강한 생태계를 강조했다. 승어부는 지난해 고 이건희 회장 추도사에서 고인의 고교 선배인 김필규 KPK통상 회장이 “승어부가 최고의 효”라며 강조했던 말이다.

새해는 이 부회장이 1991년 삼성에 입사한 후 30년이 되는 해다. 사법 리스크가 마무리된다면 회장에 오를 가능성도 점쳐진다. 삼성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이미 삼성의 명실상부한 총수이기 때문에 회장 취임은 ‘승진’보다 ‘책임’을 이어받는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며 “재계 1위 삼성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사회와 함께 호흡해야 하는 책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부회장의 ‘동행’ 비전은 코로나19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는 평가다. 삼성의 제조기술 컨설팅을 받은 중소기업들은 마스크 제작, 코로나 진단키트 등을 빠르게 생산해 품귀 현상에 대응했다. 삼성은 지난해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영국 런던 피커딜리 서커스 등의 옥외 광고에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자(Get through this together)’는 메시지를 전하는 캠페인을 전개해 주목을 받았다.

이 같은 활동은 창사 이래 처음으로 지난해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전문업체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세계의 글로벌 100대 브랜드 중 5위에 오르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에 이어 5위로 글로벌 테크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인터브랜드 측은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 상승 주요 요인으로 코로나19 대응 캠페인과 ‘갤럭시 Z 플립’ 등 혁신 상품, 인공지능(AI)과 5세대(5G) 이동통신 등 미래 기술 투자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밝혔다.

김현수 kimhs@donga.com·서동일·허동준 기자
#이재용 부회장#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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