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졸업장, 탄탄한 일자리, 고액 연봉…. 한때 남들이 우러러보는 스펙을 좇았지만, 어릴 적 품었던 자기만의 꿈에 도전해 ‘영꿈(Young+꿈) 통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청년들이 있다. 배우 프로필을 100번 넘게 돌려 99번 거절당하고, 6번 도전한 스페인 축구단 입단에서 5번 실패했지만 결국 이뤄낸 짜릿한 성취로 꿈에게 진 빚을 갚는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대 나와서 왜 연기를 해요?”
2018년 3월에 있었던 한 독립영화 오디션장. 막 연기를 마친 김재은 씨(28)를 지켜보던 한 영화 관계자는 심드렁하게 툭 내뱉었다. 연기에 대한 평가도 없이, 그게 어떤 상처가 되는지도 모르는 한마디. 재은 씨는 한참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진심을 몰라주는 것만큼 서러운 일이 없거든요. 그저 제 연기를 보여주고 싶은 건데, 누군가는 다른 조건들에만 관심을 갖죠. 연기에 도전할 때마다 자주 그런 상처를 받아요. 어떤 이들은 가진 자의 배부른 소리라고도 하지만, 꿈은 누가 대신 꿔주는 게 아니잖아요.”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만의 ‘영꿈(Young+꿈) 통장’을 가진 청년들은 곧잘 이런 벽에 부딪힌다. “왜 그 좋은 걸 마다해?” 조건을 박차고 나와 꿈에 투자하는 이들은 때론 괴짜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꿈 통장은 눈앞의 ‘수익률’을 생각하며 만드는 게 아니다. 통장을 개설하는 것 자체, 그 도전하는 과정이 청년들이 꾸는 꿈이다.
○ 진심을 채워가는 꿈의 통장
재은 씨가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건 스물세 살이 되던 2016년. 유치원 때부터 맘속에서만 품고 있던 ‘워너비(wannabe)’의 세상에 도전하기로 했다. 물론 주위에서 반대가 엄청났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르바이트와 인턴 생활을 하며 모았던 돈을 몽땅 연기학원에 쏟아부었다.
2017년엔 아예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1평짜리 연습실도 빌렸다. 전력투구를 위한 투자였다. 차근차근 정열을 쏟아부으면 지금은 마이너스인 영꿈 통장이 플러스로 바뀌리라.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제 영꿈 통장은 해질 대로 해진 노트 한 권이에요. 표를 만들고 날짜와 함께 그날 연습할 배역을 적어뒀죠. 연습 때마다 까만 동그라미를 하나씩 칠했어요. 이 노트 한 권을 채우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네요. 제 꿈을 향한 노력이 고스란히 담겼어요.”
노력은 결국 길을 터줬다. 2018년 가을, 재은 씨는 한 독립영화에서 3분 동안 중국어 독백 장면을 찍었다. 어려운 중국어 대사를 오디션에서 깔끔하게 소화해냈다. 현장에서도 “감정 표현이 좋았다”는 칭찬을 받았다. 늦깎이 연기자 재은 씨의 영꿈 통장에 가능성이 비치던 순간이었다.
아직도 재은 씨의 영꿈 통장은 현재진행형이다. 소규모 영화와 연극 수십 편에 출연하며 커리어를 쌓고 있다. 이젠 학교만 물어본 뒤 기회를 주지 않던 시절은 벗어난 셈이다.
“당장 10만 원, 100만 원이 제 인생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면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회사에 들어갔겠죠. 물론 그것도 성취감이 있지만 제가 꿈꾸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죠. 영꿈 통장에 근사한 연봉을 채우진 못했지만 제 ‘진심’을 입금했어요.”
○ 연봉은 제로라도 마음만은 부자
축구선수 구성은 씨(28). 웬만큼 축구에 해박한 이들에게도 낯선 이름이다. 일단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면 다들 깜짝 놀란다. 그런데 소속팀 이름을 대면 다들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한다. ‘우니온 엘리파(C. D. Union Elipa).’ 레알 마드리드 같은 1부 리그가 아닌 6부 리그 축구팀이다.
사실 성은 씨는 ‘축구 선수를 경험해본 적 없었던’ 축구선수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그는 아마추어임에도 남다른 실력으로 국내 K3리그(당시 4부 리그)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그저 “제대로 도전해보고 싶다”는 각오뿐이었다. 입단까진 성공했지만 수준 차라는 벽만 여실히 절감했다. 그는 군대에 갔다.
하지만 그는 휴면계좌로 잠들어 있던 영꿈 통장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 어린 시절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감동은 언제나 그를 들썩거리게 했다. 차범근축구교실에서 배운 게 다지만 무모한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전역한 뒤 그 무모함을 갈아 넣을 마이너스통장을 발견했다. 2018년 당시 스페인 7부 리그에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꿈 FC’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택배기사, 기간제 교사 등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연봉은 없다. 성은 씨도 무작정 스페인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선수로 뛰었다.
2019년엔 본격적으로 영꿈 통장을 만들었다. 제대로 스페인 지역 리그 선수가 되겠다는 게 목표였다. 5전 6기 끝에 소속 팀을 찾았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국내에 와 있는 동안 방출됐다.
통장엔 잔액도 없이 마이너스만 늘어갔지만 성은 씨는 개의치 않았다. 지난해 8월 다시 스페인으로 건너가 입단 테스트에 도전했다. 그렇게 찾은 소속 팀이 현재의 우니온 엘리파다.
지금도 성은 씨는 버는 돈이 거의 없다. 스페인은 3부 리그 이상은 올라가야 주급이라도 나온다. 그나마 유튜브에서 자신의 일상을 소개한 것이 호응을 얻어 그 수익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하지만 그의 꿈을 응원하는 수백 개의 댓글은 그에겐 통장 이자만큼이나 소중하다.
“더 잘해서 더 높은 리그에 도전해보고 싶죠. 현실적으로 4, 5부 리그만 올라가도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이렇게 도전하는 자체로도 ‘뭐든 인생에 얻는 게 있을 거야’란 자신감이 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불어난 팬들은 엄청난 수익이고요.”
○ 꿈을 잃으면 어떤 일도 즐겁지 않아
여섯 살 때부터 이어가던 피아니스트라는 ‘영꿈 통장’. 하지만 김수진 씨(34)는 고교 2학년 때 그 통장을 해지했다.
지극히 뻔하고 현실적인 이유였다.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모아뒀던 악보를 다 버리고 2005년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피아노는 취미가 됐다.
하지만 꿈을 잃은 청년에게 길고 긴 방황이 찾아왔다. 대학을 졸업해도 흔들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2011년 첫 직장에 들어간 뒤 2년 동안 이직만 여러 차례. 채워지지 않는 뭔가로 가슴이 뻥 뚫려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문화단체 사무국에서 일하다 예술인들을 마주하며 깨달았다. ‘내 꿈은 피아노구나.’
“음대를 가려고 정말 죽을 듯이 노력했어요. 레슨비를 벌려고 하루 6시간씩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한 푼도 안 썼어요. 거의 10년 만에 다시 피아노를 치니 손가락이 다 굳어 정말 애먹었죠. 하지만 일하고 밥 먹고 자는 시간 말곤 오로지 연습만 했어요.”
수진 씨는 2012년 기적처럼 음대에 합격했다. 합격한 뒤엔 더 미친 듯이 정열을 쏟아부었다.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연습만 하는 일이 평범한 일상이 됐다. 해지했던 영꿈 통장은 다시 살아나 부풀어 올랐다. 석사 과정을 마친 수진 씨는 현재 예술경영박사 과정까지 밟고 있다.
“피아노를 다시 할 수 있어 행복해요. 그것뿐이에요. 안 했으면 평생 후회했겠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는 생각으로 간절하게 원하고 노력했어요. 꿈꾸던 삶을 살 수 있어 만족스러워요. 정식 연주자가 되지 못해도 좋아요. 제 영꿈 통장은 ‘무엇이 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사는가’예요.”
○ 습생이에서 스타 인플루언서로
소셜미디어에서 수많은 팔로어를 거느린 허영주 씨(29)는 10년 전엔 ‘습생이’이라 불렸다. 습생이란 연예기획사 아이돌 연습생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오랜 노력 끝에 데뷔도 했다. 스무 살때 ‘더 씨야’란 걸그룹 멤버였다. 데뷔만 하면 스타가 될 줄 알았던 꿈은 금방 깨졌다.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습생이 때만큼 연습하고 연습했지만 무대에 설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몇 년간 습생이로 부은 ‘영꿈 통장’이 드디어 황금 알을 낳을 줄 알았건만. 이자는커녕 원금 회수조차 어려운 통장이 돼버렸다.
“매일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남 탓만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누군가가 키워주지 않아서 이런 거라고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 게 잘못이란 걸 깨달았죠.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죠. ‘댐에 물을 채우는 시간을 갖자.’ 성공 말고 성장에 투자해보자. 그게 목표이자 꿈이어야 한다고요.”
영주 씨는 남이 관리해주길 바랐던 통장을 다시 자기 품으로 찾아왔다. 자기만의 장점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소속사와 계약이 끝난 뒤 동생 정주 씨와 함께 ‘듀자매’란 그룹을 결성했다. 아직 대중가수로서 뭔가를 이루진 못했지만 지금 그들은 ‘틱톡’ 팔로어가 550만 명이 넘는다. 국내에서 틱톡 팔로어 순위 20위 안팎일 정도의 ‘인플루언서’가 됐다. 이젠 수입도 꽤 커졌다.
“당연히 수입이 생긴 것도 고맙죠. 하지만 ‘나 스스로 우뚝 섰다’라는 자부심이 더 소중해요. 고난의 시간을 겪으며 쌓은 노력이 이제 행복이란 이름으로 영꿈 통장에 쌓이는 거죠.”
“1년간 책 100권보다 매일 2장씩 읽기 목표로… 소소한 도전이 자신을 키워”
위기 때 ‘진로적응성’ 높이는 법
‘3포 세대’ ‘N포 세대’도 옛말이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가 터진 뒤엔 그냥 다 포기해야 한다. 이 시대 청년들은 불안을 일상으로 품고 지낸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게 꿈이다. 영꿈 통장을 마련해 엎치락뒤치락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두려움과 역경에도 청년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도전과 실패를 통해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을 높이 샀다. 양은주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영꿈 통장을 만들어가는 청년들의 모습이 난관 극복의 효과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며 “위기에 굴하지 않고 도전했던 경험이 나중에 찾아올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주는 레이더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다.
진로 상담 분야에 ‘진로적응성’이란 용어가 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어떤 도전이건 위기를 겪기 마련이다. 하지만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상황을 곱씹어가는 것 자체로 인간은 자신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관심과 통제력, 확신을 갖는 능력이 진로적응성이다. 청년의 영꿈 통장은 이런 진로적응성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
이런 진로적응성은 ‘작은 도전’을 해결해보는 경험을 통해 키워 나갈 수 있다. 처음부터 너무 큰 도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목적보다는 가능성의 폭을 열어놓는 것만으로도 영꿈 통장은 커질 수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소소한 도전’을 추천했다. 예를 들어 독서라는 목표를 세웠을 때 “1년 동안 책 100권을 읽어야지” 같은 거창한 목표는 오히려 실패할 확률이 높다. “매일 책 두 페이지씩 읽겠다”는 가벼운 도전을 통해 성취감을 매일 맛보는 게 중요하다. 그 결과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무기력을 극복하고 꿈도 발견할 수 있다.
심리학이나 정신건강 분야에서는 사건 사고 등으로 생긴 트라우마를 극복한 뒤 개인적인 역량과 삶에 대한 만족도가 이전보다 크게 향상되는 현상을 ‘외상 후 성장’이라고 부른다. 도전과 실패의 경험은 상처로 남지만 이를 극복해 아물고 딱지가 떨어지면 더 단단하고 건강한 새살이 돋아난다. 조용래 한림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회적 여건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걸 인정하고 적응하면서 내면의 긍정적 변화를 겪게 되기도 한다”며 “도전을 계속하고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믿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 특별취재팀 ::
▽팀장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강승현 신희철 이소연 김태성 이청아(이상 사회부) 전채은(문화부) 신지환(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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