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혁신 제품 상용화 실패, 경영진 무능 탓으로 돌리지 마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20일 03시 00분


美펜실베이니아대 사례 분석

획기적인 제품이 상용화되기는 쉽지 않다. 제품의 사업성, 신사업에 대한 회사 안팎의 평가, 회사의 제품 개발 역량 등을 고려한 다양한 판단과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벽을 넘지 못해 사라진 혁신 제품들은 무수히 많다. 경영진이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두려워해 혁신 제품들이 상용화에 실패했다는 것이 그간 경영학계의 주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최근 기획팀, 개발팀과 같은 회사 내의 ‘혁신가’ 또는 ‘발명가’의 역할을 조망한 연구 결과를 보면 색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경영진이 제품 출시에 회의적일지라도 제품 개발을 담당하는 이런 ‘혁신가’들이 적극적으로 경영진을 설득한다면 상용화에 성공할 수 있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미국 기업 제록스가 1970년대 발명한 업무용 고사양 컴퓨터인 오피스워크스테이션, 레이저프린터, 개인용 컴퓨터(PC)의 상용화 시도 사례를 분석했다. 1959년 제록스는 일반 용지를 사용하는 최초의 자동복사기 ‘제록스 914’를 시장에 선보여 큰 성과를 거뒀으나,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회사의 성장이 정체됐다. 새로운 혁신 제품으로 신성장의 동력을 얻고자 한 제록스는 오피스워크스테이션, 레이저프린터, PC를 개발했다. 결론적으로 오피스워크스테이션과 레이저프린터는 상용화에 성공했으나, PC는 실패했다. 차이는 각 제품을 담당한 기술혁신팀이 제품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오피스워크스테이션은 호평이 이어져 어려움 없이 출시 계획이 추진됐지만, 레이저프린터와 PC에 대한 내부의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 특히 상품화의 엄격한 잣대로 적용된 예상 매출, 예상 마진율, R&D 투자 규모, 경쟁사인 IBM과의 경쟁 가능성 측면에서 레이저프린터와 PC 모두 적합하지 않거나 미흡한 것으로 판단됐다. PC와 레이저프린터의 출시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PC 기술혁신팀은 평가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PC를 출시하지 못한 제록스는 이후 PC 시장에서 애플과 같은 후발주자들에 크게 뒤처졌다. 반면, 레이저프린터 기술혁신팀은 경영진 및 관련 부서 설득에 나섰다. 하나의 상용화 평가 기준이 모든 제품에 동일하게 적용돼, 신제품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기술혁신팀이 평가 기준의 수정과 레이저프린터 상용화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결과, 경영진으로부터 추가적인 지원을 받아냈고 레이저프린터는 상용화에 성공했다.

오피스워크스테이션과 레이저프린터는 1970년대 제록스를 지금의 애플에 버금가는 혁신 기업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 제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레이저프린터의 성장에는 자칫 묻혀버릴 뻔한 혁신 제품을 주력 제품으로 키우기 위해 경영진을 설득한 기술혁신팀의 공로가 크다.

혁신 기술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해도 이를 경영진의 무능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 경영진은 기회와 동시에 위험도 고려해야 한다. 혁신 기술은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 회사 내부의 반발이 있을 수 있고, 지속적인 투자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 결국, 혁신이 상품화되기 위해선 기업의 혁신가와 발명가들이 기술 개발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용화를 주도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를 갖춰야 한다.

류주한 한양대 국제학부 교수 jhryoo@hanyang.ac.kr

정리=이규열 기자 kylee@donga.com
#혁신제품#상용화#美펜실베이니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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