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B산업은행이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통합을 추진하면서 “대한항공의 건전경영 감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만든 ‘경영평가위원회’(경평위)가 위원을 뽑을 때 대한항공 대주주 한진칼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21일 본보가 입수한 산은의 대한항공 투자합의서에는 이런 내용의 ‘대한항공에 대한 경영평가’ 조항이 담겨 있다.
조항에 따르면 산은은 채권단 임직원, 외부 전문가 등 5인 이상 6인 이내의 경평위를 구성해 대한항공 경영을 평가하기로 했다. 대한항공 경영 실적과 계획 이행 내용 등을 담은 연간 보고서를 작성해 등급(A∼E)을 매긴다. 평가 등급이 E(불량) 또는 2년 연속 D(부진)이면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경영진을 교체하고 2년 연속 A를 받으면 이듬해 경영평가를 면제한다.
양측은 경평위 위원 선정과 관련해 “산은이 추천한 위원 후보 중 한진칼이 동의한 위원으로 구성한다”는 문장을 넣었다. 한진칼은 대한항공 지분 29.27%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또 경영평가를 위한 세부 요소나 평가 기준, 방식, 경영 목표 등을 정할 때 한진칼과 협의해 확정하기로 했다. 대한항공 평가에 대한항공 대주주가 영향력을 미치는 구조다.
산은은 지난해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통합이 대한항공과 조 회장에 대한 특혜라는 지적이 나오자 기자회견을 통해 여러 견제 장치가 있다고 반박했다. 산은은 대한항공 경영 성과가 미흡하면 조 회장과 경영진을 교체할 수 있고 경평위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구체적인 경평위 운영 방식은 공개하지 않았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선수가 심판을 선정하는 셈이다. 엄정한 경영평가가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교수는 “산은은 항공 전문성 확보 차원에서, 한진칼은 경영권이 걸려있다 보니 조율을 한 것 같다”고 언급했다.
‘협의’가 필요하다고 한 만큼 한진칼이 반대해도 평가 기준 마련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러나 ‘협의’ 문구 때문에 산은의 경영평가가 부실하게 이뤄진 사례는 없지 않다.
산은은 2011년 국정감사 지적에 따라 대우조선해양을 감시하는 상근 감사위원 제도와 수주 관련 의사결정 기구 등을 도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2016년 감사원 감사 결과 이런 조치는 지켜지지 않았다. 감사에서 산은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과 협의해 개선 방안을 마련하도록 약정돼 있어 회사가 반대하는 제도를 도입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협의’라는 문구 때문에 제대로 된 감시를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산은 측은 본보 취재에 “경평위 구성은 현재 진행 중이다. 투자합의서에 관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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