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강남본부장이던 박현주는 전국 약정(주식 매매실적)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입사 후 5년 만에 지점장, 10년 만에 본부장(이사 등) 등 최연소 기록을 잇따라 깼다. 당시 여의도 증권가를 출입하던 기자는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에서 박현주의 매매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정보를 포착했다. 당국에선 기록적인 약정 실적이 혹시 작전 주식을 매매하는 것과 연관된 것은 아닌지 면밀하게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에선 무슨 일이 있어났을까.
# ‘매매 종목 리스트를 보여 달라’
국민은행장을 지내다가 지금은 작고한 동원증권 김정태 부사장을 찾아가 박 본부장이 어떤 종목을 매매하는지 리스트를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고객 보호와 관련된 것이라 압구정지점의 매매 종목을 보여줄 수는 없다고 했다. 혹시 중소형 작전주에 손을 대는 게 아니냐고 물어봤지만 김 부사장의 대답은 “무슨 소리냐, 박현주는 우리 회사의 보물”이라고 했다. 이어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찾아 가서 어떤 종목을 사고파는지 물어보라”고 권했다.
다음날 성수대교 남단에 위치한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을 찾아갔다. 평소 전화 취재는 했지만 대면(對面) 취재는 처음이었다. 그는 대형우량주 중심으로 매매하고 있었다. 약정 실적이 높은 비결은 뛰어난 시장 판단력에 높은 명성, 여기다 법인투자가를 공략한 덕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증권사 객장에선 개인투자자 위주의 영업이 관행이던 시절이었다. 박 본부장 아래 압구정지점장은 구재상(현 케이클라비스투자자문 대표), 서초지점장에 최현만(현 미래에셋대우 부회장)으로 이들은 ‘박현주 사단’으로 불렸다. 미래에셋그룹의 신화를 만든 주역들이다.
# 뮤추얼펀드 신화
39살 되던 해 박현주는 잘 나가던 동원증권 이사 자리를 박차고 미래에셋캐피탈을 설립했다. 샐러리맨으로선 최고의 전성기에 자리를 떠난 것이다. 그를 지극히 아끼던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붙잡으려했지만 박현주는 마흔이 되기 전에 자기 사업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며 뿌리쳤다. 1997년 외환위기와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상징인 대우그룹의 경영위기,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과 살인적인 고금리, 대량실직 등 급변하는 경제 환경에서 박현주는 투자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꿀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대우채권 부실화가 금융시장을 강타하면서 기존의 한국투신 대한투신 국민투신이 골병을 앓았을 때 자신의 이름을 내건 뮤추얼펀드 ‘박현주펀드’를 선보였다. 기존 투신사들에 대한 불신이 고조됐을 무렵 그는 거꾸로 ‘투명한 자산운용’을 내걸었다. 박현주는 서울 조선호텔을 시작으로 부산 서면 롯데호텔, 광주 파크호텔, 대전 유성호텔 등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면서 투자설명회에 직접 나섰다. 왜 지금 뮤추얼펀드인지, 앞으로 주식시장이 어떻게 바뀔지, 개미군단들은 전문가가 운용하는 펀드로 갈아타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박현주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 뮤추얼펀드 주총장에 나서다
박현주펀드 1호는 대박을 쳤다. 수익률은 더블이 났고, 투자자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객장에선 박현주펀드를 사달라는 아우성이 가득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뮤추얼펀드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2호, 3호, 4호 등이 잇따라 선보였다. 그러나 이듬 해 주식시장이 곤두박질치면서 손해를 비켜가질 못했다. 박현주펀드 2호에서 원금 손실이 발생했고, 투자자들의 항의가 터져 나왔다. 종합주가지수가 반 토막이 나면서 펀드도 동반 하락했다. 2000년 10월 펀드 투자자들의 요구로 임시주주총회가 소집됐다. 박현주는 성난 투자자들의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주총장에선 “사재(私財)를 털어서라도 손실을 물어내라”고 항의하는 주주도 있었다. 투자문화를 바꿔보겠다며 주총장에 나선 박현주는 당황했다. 그는 “법이 정한 범위를 벗어나 책임을 진다면 회사는 물론 간접투자시장은 공멸하게 될 것이다. 투자자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설득했다. 박 회장은 아직도 당시를 잊지 못한다. 뮤추얼펀드 첫 주총장에서 낭패를 겪어야 했다. 주식과 펀드에 대한 투자자들의 사고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 SK생명과 대우증권 인수로 자본시장의 메기가 되다
‘박현주펀드’는 미래에셋의 대명사였다. 그의 이름을 내걸고 운용한 펀드는 간접투자 시장의 문화를 바꿔놓았다. 내 돈을 누가 운용하는지 알 수 있는 펀드매니저실명제 바람이 자본시장에 거세게 불어 닥쳤다. 2005년 버크셔 해서웨이 같은 투자회사를 만들기 위해 SK생명(현 미래에셋생명)을 인수했다. 투자형 보험회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IFRS(국제회계기준) 도입으로 자본규제를 받아 투자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서 보험사를 통한 그의 꿈은 아직도 못 펼치고 있다.
7명의 직원을 데리고 퇴직금과 사재를 털어 압구정 사거리에 자본금 100억 원짜리 조그만 투자자문사에서 출발한 것이 미래에셋이었다. 여의도 자본시장에서 부동(不動)의 1위이던 대우증권을 2015년에 집어삼켰다. 대우증권 이름 앞에 미래에셋을 붙인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었다. 사세는 확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자신의 본업과 관련이 없는 은행에 대해선 일절 눈을 돌리지 않았다. 미래에셋은 투자회사라는 회사 철학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 유튜브에 출연한 자본시장의 거목(巨木)
박 회장은 보험과 증권 등의 M&A(기업인수합병)를 통해 영역을 넓혔다. 그는 돌연 2018년 회장직을 내려놓고 미래에셋대우의 홍콩법인 투자전략가로 변모했다. 언론 인터뷰는 모두 사양했다. 대신 미국 중국 남미 동남아 등 세계를 돌아다니며 글로벌 투자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했다.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본성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했다. 대통령의 청와대 행사에도 거리를 두면서 국내 정치와는 담을 쌓았다. 그랬던 박 회장이 최근 유튜브에 잇따라 출연했다. 유튜버로의 변신일까? 미래에셋에서 운용하는 ‘스마트머니’라는 유튜브에서 애널리스트와 컨퍼런스를 주관하면서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 등에 대한 전망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애널리스트와 대화하면서, 임직원들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면서 ‘회장님’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대담 중에 단도직입적으로, 그리고 중간에 말을 자르면서 질문을 던지는 모습은 마치 기자가 취재하는 듯했다. 격의 없이 토론하는 모습에서 미래에셋의 개방적인 토론 문화가 엿보였다.
박 회장은 과거 대기업그룹의 한 회장님이 곤지암에서 한 만찬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갑자기 전화로 오후 4시쯤 저녁을 하자고 해서 곤지암까지 갔다. 사회에서 귀감이 되는 분이셨다. 그날 회사 임원들과 만찬이 예정돼 있었지만 급히 취소했다. 식사 시간은 2시간 남짓했지만 내 인생에 교훈을 준 시간은 10분가량이었다. 곤지암으로 오간 시간만 5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좋은 사람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에피소드였다.
# 디지털 시대의 소통 유튜브
자본시장의 신화로 불리는 박현주 회장의 사내 회의 장면을 유튜브에서 보는 것은 다소 생경하다. 애널리스트에게 던지는 질문을 보면서 “압박 면접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는 댓글도 올라 왔다. ‘회장님 유튜브’는 있는 그대로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회의 분위기와 표정까지도 그대로 전달한다. 최경주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은 “창업 초창기 박 회장은 전국을 돌면서 무추얼펀드 투자설명회를 가졌다. 직접투자보다는 간접투자, 수익증권보다는 뮤추얼펀드가 낫다는 점을 널리 알려야 했다”면서 “지금 같은 초저금리 상황에서 은행에 돈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올바른 투자정보를 주기 위해 출연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3,4대로 넘어간 여느 대기업 총수와 달리 창업 1세대다. 반도체 클라우드 전기차 그린에너지 이커머스·게임 바이오 등 산업의 흐름과 ETF(상장지수펀드), 변액연금에 이르기까지 투자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지금까지 출연한 5회의 유튜브는 누적 조회 수가 100만을 넘었다. 디지털시대 박현주가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 투자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 청년 동학개미에게 주는 메시지
5번의 유트뷰 중에 3회 ‘미래 세대를 위한 조언’은 최근 증시 과열에 대한 걱정을 보여준다. 청년 동학개미들에 대한 충고다. 박 회장은 “지난해 주식시장에 들어온 돈이 100조원이나 되고, 직장에 가면 온통 주식 얘기라는 상황은 걱정스럽다”며 “주식시장이 너무 뜨거워 염려스러워 이 영상을 찍게 됐다”고 했다. 박 회장은 “직장에서 경쟁이 치열한데 주식을 하면서 어떻게 일에 열중할 수 있느냐. 무엇보다 자기가 하는 일에 열정을 가져야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 주식으로 돈을 버는 것은 전문가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주식에 투자하는 직장인이나 학생들은 날마다 주가변동을 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100만원을 투자한다면 20~30만원은 주식에, 나머지는 ETF에 투자하는 자산배분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누가 추천한다고 해서 주식을 사면 안 되며 귀가 얇은 사람은 투자에서 금물”이라며 “성격이 급한 사람은 상투에서 주식을 사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학생 시절 증권사 직원이 권유한 종목에 투자해 돈을 다 날리고 빚을 내 신용으로 산 주식도 깡통이 된 자신의 초보 시절 투자도 소개했다.
그가 동학개미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주식시장에 관심이 없는 청년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
첫째, 누구나 살면서 어려운 시기가 오게 마련이다. 젊은 시절에 고민이 있고, 나도 공포감을 느꼈다. 하지만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나만의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경영학과(박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3등은 단자회사(투자금융)를 갔고, 학점이 좋은 학생들은 안정적인 은행을 선호했다. 친구가 굉장히 좋은 직장에 들어가 증권회사에 취업한 나와 비교가 됐다. 하지만 좌절할 필요가 없다.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성공의 스토리가 아니라 성장의 스토리다.
# 까칠한 사람 되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라
둘째, 좌절하지 말고 역량을 배양하라. 나도 사업을 하면서 좌절하고 싶은 시기가 있었다. 그럴 때는 길게 다시 돌아봐야 했다. 6개월 정도 멀찌감치 물러서 떨어져있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장기적으로 사물을 바라봤다.
셋째, 살아가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인터넷만 보지 말고 동아리를 만들어 이코노미스트나 파이낸셜타임스(FT) 경제지 등의 중요한 파트를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책 읽기는 고수(高手)와의 대화다. 나는 1년에 3000~5000 페이지 분량의 독서를 한다. 이를 통해 많은 전략을 수립한다. 1년에 약 200~300개의 거래에 대해 의사결정을 내린다. 책을 읽다가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엉터리 책이라고 하지 말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까칠한 사람이 되지 말고 개방적이어야 한다. 저자와 대화하듯 책을 읽어라. ‘Good to Great’라는 책은 몇 파트가 이해 안 돼 여러 번 읽기도 했다.
넷째, 주식에 관심이 없으면 노후에 가난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개인의 자산포트폴리오에서 주식 비중이 50%나 되지만 한국은 10% 남짓이다. 미국 투자자들은 글로벌하게 분산해서 투자한다. 세상은 굉장히 넓다. 투자 또한 글로벌한 관점에서 해야 한다. 글로벌 ETF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개별 종목의 주가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손실을 줄이려면 종목 투자를 하지 말고 ETF에 분산투자하고 매달 조금씩 적립하듯 하라.
주식시장이 연초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주식을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부의 격차도 커지는 모습이다. 강세장이라고 모든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주식은 제로섬 게임이다. 우리 시대 투자의 현인(賢人)이 던지는 인생투자 메시지에 청년들이 더욱 귀 기울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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