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출근 시간이 지났지만 주차 공간을 찾기 어려웠다. 2중, 3중 주차로 가뜩이나 빽빽한 주차장에 이삿짐 차량이 3대나 나란히 서 있었다. 리모델링 업체나 인테리어 업체의 트럭들이 좁은 길을 연이어 오가고 있었다. 아파트 공동 현관에 들어서니 1층 입구부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짐이 줄지어 있었다. 이곳에서 전세로 사는 직장인 최성욱(가명·49) 씨는 “부쩍 늘어난 이사 차량을 볼 때마다 언젠가 나도 쫓겨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씁쓸해했다.
동아일보가 은마아파트 등기부등본을 분석한 결과 이 아파트 주민 중 세입자 비중은 66%에 이르렀다. 계약갱신요구권과 전월세상한제를 담은 임대차2법이 시행된 데다 2년 이상 거주한 집주인에게만 재건축 조합원 자격을 주는 방안이 추진되면서 이 아파트 기존 세입자가 대거 내몰릴 수 있는 상황이다.
○ 재건축 실거주 규제에 2600가구 세입자 불안
성동구에 살던 최 씨가 이곳으로 이사 온 건 지난해 1월. 올해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되는 자녀의 교육 때문이었다. “새 학교에선 알아서 공부하는 분위기라더라”는 아이의 말을 듣고 막내의 대학 입시 때까지 살기로 했다. 은마아파트에서 최소 6년은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용면적 76m²에 보증금 5억 원을 내고 전세로 들어온 최 씨는 벌써 주거 불안을 느끼고 있다. 내년 1월에 계약갱신요구권을 사용해도 지금 조건대로 살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3년. 이후 계약 때 이 아파트의 다른 전셋집을 찾으려면 보증금을 크게 올려줘야 할 수도 있다. 최근 전세 시세는 10억 원 언저리다.
이처럼 마음을 졸이는 세입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은마아파트 등기부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 아파트의 현 소유자 중 은마에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전체의 59.8%(2600여 채)에 이른다. 실거주 요건을 강화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집주인들의 전입 러시가 이어질 수 있다. 현 세입자들은 다른 집을 찾아야 하는 셈이다. 집주인이 2년 거주 요건을 채운 뒤에는 전세금을 올려 다시 세를 놓으려 할 수 있다.
○ 임대차법 시행에 전세난 심화
은마아파트는 그동안 자금이 부족해도 자녀를 대치동에서 교육하고 싶은 학부모들에게 가성비가 좋은 전세물량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왔다. 2003년부터 10년간 은마아파트에 살며 학창 시절을 보낸 김종현(가명·32) 씨는 은마아파트를 “계층 이동 사다리”라고 했다. 그는 “부잣집은 아니어도 교육열 높은 가정에서 대치동에 전세로 들어와 좋은 교육 인프라를 이용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은마아파트 전세가 비교적 싸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건물이 노후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가)이 약 25%에 머물렀다. 같은 기간 KB국민은행이 발표한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가율(56%)과는 큰 차이다. 지난해 6월까지만 해도 은마아파트 전세가는 약 5억5000만 원에 그쳤다.
하지만 지난해 7월 말 임대차법 시행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지난달 중순 전용 76m² 전세가 보증금 10억 원에 계약됐다. 불과 반년 동안 2배 수준으로 오른 셈이다. 직장인 최재혁 씨(28)는 ‘은마 전세대란’의 피해를 보고 있다. 최 씨 가족은 2009년부터 12년째 이곳에 살고 있다. 한집에서 10년 넘게 계약을 연장하는 동안 전세금은 2억3000만 원에서 약 4억 원으로 올랐다. 하지만 올해 7월에는 집을 비워줘야 한다. 집주인이 본인이 거주할 테니 계약이 끝나면 나가 달라고 일찌감치 통보했다. 단지 내 다른 전세매물을 알아봤지만, 임대차2법 시행 이후 전세금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그는 “10년 넘게 산 동네를 떠나고 싶진 않아 인근 빌라 전세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선한 의도로 만든 임대차법이 은마아파트 세입자를 내몰고 있는 셈”이라며 “2∼3년 후 계약갱신요구권을 사용한 세입자들이 쫓겨나기 시작하면 문제는 더 커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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