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용(가명·75) 씨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1987년부터 35년째 살고 있는 1주택자다. 처음 이사 올 당시 전용면적 76m²의 매매가는 4000만 원. 이 시기 삼성전자 대졸 신입사원 월급이 35만 원 선이었다. 한 푼도 안 쓰고 10년 가까이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집이었다. 직장이 있는 서초동까지 가려면 버스를 4번 갈아타야 했지만 그는 대치동의 주거여건이 좋아질 것이라는 전망에 기대를 걸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은마아파트에는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미래의 ‘한 방’을 기다리겠다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 주택대출 규제에 문턱 더 높아진 ‘그들만의 리그’
은마아파트 전체 매매의 43.1%는 대치동이 ‘교육 1번지’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1995년부터 10년 동안 이뤄졌다. 직장인 김성인(가명·32) 씨가 은마아파트로 이사 온 것도 1990년대 중반 무렵이다. 그는 “아프면 동생을 찾아가고, 법적 문제가 생기면 로스쿨 출신 동창에게 연락하는 식”이라며 “이런 인맥이야말로 이 동네에서 자라 누리는 혜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입지와 인적 네트워크는 은마아파트 소유주들이 “낡고 불편해도 계속 보유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1주택자는 물론이고 다른 곳에 집을 갖고 있는 다주택자들도 은마를 ‘똘똘한 한 채’로 여기고 있었다.
현재 15억 원 초과 아파트에 대한 주택담보대출 금지 규정 때문에 은마아파트를 사려는 사람들은 은행에서 담보 대출을 받을 수 없다.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돼 실거주 목적의 매매만 가능하다. 그런데도 지난해 12월에 이어 올해 1월에도 매물이 나오는 대로 거래가 이뤄진다. ‘현금 부자’들의 수요는 꾸준하다는 뜻이다.
실제 은마아파트 1147채의 등기부등본 분석 결과 577가구(50.3%)의 집주인들은 대출이 전혀 없었다. 전체 평균 대출액도 1억8700만 원 선으로 현 시세의 10%에도 못 미친다. 2016년 대출 없이 은마아파트를 산 양혜숙(가명·55) 씨는 “정부 규제가 돈 있는 사람들한테는 통하지 않는다”며 “대출 규제는 중산층이 대치동에 진입하는 걸 막는 장벽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 양도세 피해 증여로…집주인 ‘버티기’에 매물 실종
부동산시장의 리스크에 익숙해진 이곳 집주인들은 정부 규제의 영향을 나름대로 분석하며 탈출구를 찾고 있다. 서울 광진구에서 전세로 살던 강승민(가명·44) 씨는 2018년 부모님에게 은마아파트를 증여받은 뒤 기존 세입자를 내보내고 들어와 살고 있다. 맞벌이라 어린 두 자녀를 부모님에게 맡기려면 은마아파트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학창 시절을 은마아파트에서 보낸 강 씨는 “부모님이나 저나 은마를 팔 생각이 없다”며 “재건축 이후에도 계속 거주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세금 부담 때문에 증여로 돌아서는 추세도 감지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뤄진 은마아파트 증여의 57.7%가 현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이후 이뤄졌다. 집주인들은 보유세와 양도세 인상 여파로 세금이 늘었지만 집을 팔기보다는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걸 택했다. 정부는 고가주택 소유자와 다주택자를 겨냥해 세금 인상 카드로 아파트를 팔라고 압박하지만 은마아파트 집주인에게는 먹히지 않은 셈이다.
은마아파트 집주인의 58.3%는 10년 이상 보유한 사람들이었다. 단지의 가치를 잘 아는 장기 보유자가 많아 정책 변수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다. 이 아파트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김성민(가명·62) 씨도 자녀들이 향후 여기서 살기를 원한다. 그는 “재건축까지 된다면 주거 환경이 더 좋아지지 않겠느냐”며 “자녀들에게 입지를 물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산 사람도 버티기에 들어갔다. 일선 중개업소는 다주택자들이 상대적으로 미래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진 은마아파트를 먼저 팔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소유한 등록임대사업자 이강열(가명·67) 씨는 임대의무 기간을 채우기 위해 2025년까지 은마아파트를 보유하며 세를 줄 예정이다. 그전에 팔면 양도세가 중과된다. 그는 “최대한 오래 버티려고 한다”고 했다.
김호경 kimhk@donga.com·정순구·이새샘 기자
‘은마’ 집주인 절반 대출 없는데 대출-세금 규제 ‘엉뚱한 처방’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사는 김성민(가명·62) 씨는 요즘 하루 종일 손자를 돌본다. 원래 손자는 아파트 1층 어린이집에 다녔다. 하지만 어린이집을 세놓던 집주인이 직접 들어와 살겠다고 하면서 어린이집이 문을 닫았고 김 씨의 ‘독박 육아’가 시작됐다. 지난해 6월 재건축 조합원이 2년 동안 실제 살지 않으면 분양자격을 박탈하는 법 개정안이 발표되면서 불똥이 김 씨에게 튄 셈이다.
은마아파트를 7년째 보유 중인 김 씨는 세금 문제로도 고민 중이다. 2010년 자녀 교육을 위해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왔다. 주거여건이 마음에 들어 2014년 전세금 5억 원에 은행 대출 3억 원과 현금 1억 원을 보태 생애 처음 자기 집을 마련했다. 평생 살 생각이었던 만큼 집값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집값 급등으로 보유세가 크게 오른 게 문제였다. 그는 지난해 보유세로 약 540만 원을 냈다. 보유세는 올해 750만 원에 이어 내년에는 960만 원까지 뛴다.
1979년 지어진 은마아파트는 한국 재건축 아파트의 상징이었다. 투기 수요가 몰려 집값을 요동치게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정부 규제의 타깃이 돼 대출과 세금 규제, 실거주요건 강화 추진,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등이 쏟아졌다. 이러면 투기 수요를 차단하고 매물이 늘어나 집값이 안정될 것이라는 게 정부의 기대였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2일 부동산 빅데이터 플랫폼인 밸류맵과 은마아파트 4424채 가운데 평형과 동에 따라 추출한 1147채(25.9%)의 등기부등본을 정밀 분석한 결과 지난 41년 동안 은마아파트 1채당 거래 횟수는 평균 2.5회로 나타났다. 아파트를 산 사람들의 평균 대출금은 1억8760만 원이었고, 집주인의 절반은 대출금이 한 푼도 없었다. 집주인 10명 중 6명은 집을 산 뒤 10년 이상 보유했다. 은마아파트에는 고액 대출로 집을 산 뒤 시세차익을 노려 단타매매를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통념을 뒤집는 결과다.
주택시장의 ‘뜨거운 감자’인 은마아파트 주거실태를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는 주요 재건축 단지에 대한 정교한 주민실태 분석 없이 부동산정책을 추진해왔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제대로 된 진단 없이 처방하다 보니 온갖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순구 soon9@donga.com·김호경·이새샘 기자
2억→11억→7억… ‘부동산경기 바로미터’ 은마
“평당가 68만 원, 동·호수 지정 선착순 계약!”
1979년 은마아파트가 준공될 당시 광고 문구다. 작은 평수인 31평형(현재 전용면적 76m²)의 분양가가 2100만 원 안팎이었다. 현재 같은 평형의 은마아파트 시세는 20억 원을 훌쩍 넘어섰다. 40년 사이 100배 수준으로 올랐다.
은마는 줄곧 강남 재건축 아파트의 대명사로 불리며 부동산 시장 흐름을 그대로 반영해 왔다. 시세가 급등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재건축이 가시화되면서다. 전국이 집값 급등에 몸살을 앓았던 때다. 정부는 은마 등 재건축 아파트를 집값 불안의 진원지로 보고 재건축을 규제했다. 그런데도 은마 시세는 2000년 2억 원에서 2007년 11억 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금융위기 이후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은 단지 역시 은마였다. 2013년 7억 원대까지로 하락했다. 주택 경기가 살아나며 2017년 11억 원대로 가격이 반등했다.
정부는 이후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와 분양가상한제,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 등 강력한 규제를 잇달아 도입했다. 하지만 매물이 실종돼 거래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부 거래를 통해 가격만 오르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1∼6월) 내내 200∼300개 수준이던 은마아파트 매물은 지난해 7월 이후 급감해 이달 2일 현재 75개 수준에 그친다. 실거래 건수도 지난해 상반기 75건에서 하반기 21건으로 급감했다. 은마아파트 전용 84m²는 지난달 24억 원에 거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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