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19년 4월 19일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사업의 첫 생산 기지인 충남 서산 배터리 공장을 돌아본 뒤 이 같은 포부를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이 2017년 중국 장쑤성, 2018년 헝가리 코마롬과 미국 조지아주에 배터리 공장 구축을 차례로 발표한 뒤였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4월 29일(현지 시간), SK이노베이션은 예상치 못한 사업적 변수를 맞닥뜨렸다. LG화학(당시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델라웨어주 연방지방법원에 영업비밀 침해로 제소한 것이다. “전기차 배터리 후발 기업인 SK이노베이션이 자사 배터리 핵심기술을 포함한 영업비밀을 조직적으로 탈취했다”는 취지였다.
● ‘핵심 인력 대거 이직’이 소송전의 도화선
소송전은 LG에너지솔루션을 떠나 SK이노베이션으로 ‘이직’을 택한 전기차 배터리 사업 관련 인력이 도화선이 됐다.
LG 측은 2017, 2018년 2년간 자사 전지사업본부 소속 인력 100여 명이 SK이노베이션으로 이직했으며 이 과정에서 SK이노베이션 측이 조직적으로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비밀을 빼냈다고 주장했다. 입사 지원 서류에 전기차 배터리 관련 프로젝트 경험과 핵심 공정 기술, 동료의 이름 등 주요 영업비밀을 적도록 하는 방식으로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는 주장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LG에너지솔루션 측은 인력 채용 과정에서 영업비밀이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유출됐다고 판단했다”라며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사업이 급성장한 배경 또한 LG에너지솔루션 자사 기술이 바탕이 됐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소송전이 시작되면서 LG에너지솔루션, SK이노베이션 양사 모두 내부적으로 크게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SK이노베이션은 ITC 최종 판결 결과에 따라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1·2공장 투자금액 약 3조 원이 허공에 날아갈 위기에 처했다. 배터리 물량 수주를 계약한 포드, 폭스바겐 등 완성차업체와의 배상 문제도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SK이노베이션은 “경력직 이동은 공식 절차에 따라 당사자 의사로 진행됐다”며 “구체적으로 어떤 핵심 기술이 유출돼 실제 공정에 적용됐는지, 이로 인해 LG에너지솔루션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을 견지하며 소송에 적극 대응했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소송을 제기한 입장이지만 내부적으로는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SK이노베이션의 사업적 성장은 둘째치더라도 인력 유출 자체만으로 큰 타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독일 완성차 업체와 거래를 담당하던 ‘독일팀’ 구성원들 상당수가 SK이노베이션으로 이직을 택해 사업 진행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또 내부적으로 “A 책임은 이직을 통해 연봉이 50% 이상 높아졌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는 탓에 조직 분위기 또한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 장외전, 맞소송 불사하며 ‘감정싸움’으로
소송전 시작 후 양 사는 장외전, 맞소송도 불사하며 화력을 쏟았다. 2019년 9월 SK이노베이션이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별개로 ITC와 델라웨어주 연방지방법원에 LG에너지솔루션을 전기차 배터리 특허 침해로 제소하자 LG에너지솔루션이 곧바로 또 다른 특허 건 침해 맞소송을 제기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SK이노베이션 및 인사담당 직원 등을 서울지방경찰청에 형사고소하고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물밑 여론전 역시 치열하게 이뤄졌다. 일부에서는 유럽 국가들의 배터리 내재화 결정, 중국 배터리 기업들의 성장 등을 근거로 “한국 기업끼리의 싸움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국내 기업끼리의 소송전이 국익에 반한다는 여론이었다. 수천억 원에 달하는 양사의 ITC 소송비용을 이유로 “국내 기업끼리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LG에너지솔루션 측은 “공정한 경쟁이 이뤄져야 글로벌 배터리 전쟁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핵심기술 및 영업비밀이 보호돼야만 한국 배터리 산업의 발전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양 측은 약 3년여에 걸친 소송 기간 동안 형사 고소와 손해배상 청구 소송, 수십 개의 보도자료와 입장문을 주고받았다. 서로의 입장문에는 ‘억지, 왜곡, 비하’ 등의 단어까지 등장하는 등 소송전은 수시로 ‘감정 싸움’으로 비화됐다.
● 실패로 끝난 ‘협상 기회’
양 사에 협상의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기대를 모았던 협상은 2019년 9월에 있었다. 당시 신학철 LG화학 부회장,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은 서울 여의도 한 호텔에서 마주앉았다. 소송전 시작 5개월 만이었다. “합의의 노력을 하라”는 정부의 중재를 통해 마련된 자리였다.
하지만 이 만남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LG 측에서는 당시 정호영 LG화학 최고운영책임자(COO·현 LG디스플레이 사장)가 참석하겠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SK측 협상 파트너로는 당시 배터리 사업을 담당하던 윤예선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대표의 참석을 요구했다.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의 생각은 달랐다. SK이노베이션은 처음부터 김준 총괄사장의 참석을 생각했다. ‘결정권자’가 나와야 의미 있는 협상이 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만남은 시장의 기대와 달리 2시간 만에 끝났다. LG에너지솔루션은 ITC 소송을 제기할 때부터 요구해왔던 △공개적인 사과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 △합리적 보상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은 인력 유출에 따른 피해 보상 등을 제한적으로 제시하며 협상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두 기업의 대화는 엇갈리기만 했고, 의미 있는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이후 치열한 여론전을 반복해온 양사는 ITC의 최종 판결 결정이 다가올 때마다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ITC는 소송 최종 판결일을 3차례 연기했다. 이 때마다 법무 담당팀 인사 위주로 구성된 양사의 협상팀이 만나 입장을 나눴다. 또 지난해 말에는 SK이노베이션 김준 사장과 LG에너지솔루션 김종현 사장이 직접 두 차례 협상을 위해 만나기도 했다.
정부도 중재에 나섰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지난달에는 정세균 국무총리가 “LG와 SK가 3년째 소송을 하며 수천억 원의 소송비용을 쓰고 있다. K배터리의 미래가 앞으로 정말 크게 열릴 텐데 작은 파이를 놓고 싸우지 말고 큰 세계 시장을 향해 적극 나서는 상황을 빨리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합의를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회사 모두 “원만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입장을 밝힐 뿐 합의금 수준에 대한 입장이 크게 엇갈리면서 합의를 보지 못했다. LG에너지솔루션 측은 “수차례 협상 테이블이 열렸지만 배상액 및 구체적 지급 방식 등에서 양사의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고 이유를 밝혔다.
● 결국 승기 잡은 LG…포드도 “LG-SK 합의하라”
결국 10일(현지 시간) ITC는 LG에너지솔루션이 제기한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앞서 지난해 2월 내렸던 SK이노베이션의 조기(예비)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다만 제한적으로 포드의 전기픽업트럭 F150향 배터리 부품·소재는 4년간, 폭스바겐 MEB향 배터리 부품·소재는 2년간 수입 유예를 허용했다. 각 제조사가 새로운 대체 배터리 회사를 찾을 시간을 줬다는 분석이다. 사실상 SK이노베이션은 장기적으로 LG에너지솔루션과의 합의 없이는 미국 내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재계에서는 11일 ITC의 최종 판결로 중단됐던 양측의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협상의 주도권은 승소한 LG에너지솔루션이 잡은 상태다.
SK이노베이션은 2018년 조지아주에 배터리 제1공장(연간 9.8GWh) 투자를 처음 결정하면서 지금까지 총 3조 원에 달하는 투자를 벌인 상태다. 만약 LG에너지솔루션과 합의를 하지 못할 경우 수조 원을 들여 건설한 배터리 공장은 수입 유예 기간인 2~4년이 지난 뒤 가동을 멈춰야 한다.
SK이노베이션의 고객사도 합의를 종용하는 상태다. 실제로 짐 팔리 포드 최고경영자(CEO)는 11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회사의 합의는 궁극적으로 미국 (전기차) 제조업체와 노동자들에게 최선의 이익이 된다”며 양사의 합의를 종용했다.
ITC 최종 결정 이후 60일 이내에 미국 대통령이 자국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경우의 수가 남았지만 현실화될 가능성은 낮다. 지금까지 특허 침해가 아닌 영업비밀 침해 건에 대해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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