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0∼1%대에 수렴하고 고금리 적금 상품은 씨가 마르면서 대기자금을 주식투자로 옮기려는 ‘머니무브(자금이동)’가 이어지고 있다. 코스피 가 3,000을 돌파한 이후 다소간의 등락에도 주식 시장은 대체적으로 호조를 유지하는 반면 은행의 자금 이탈은 가속화되는 모습이다.
직장인 유모 씨(33)는 지난해 2월 하나은행이 사명 변경을 기념해 사흘간 한시적으로 판매한 특판 적금 만기를 앞두고 있다. 이 적금은 연 5%대 금리로 당시 파격적인 고금리를 제공해 사흘 만에 132만3745좌가 개설되고 입금 첫 달에 3665억 원이 불입돼 화제를 모았다. 한 달 전 은행 지점 직원으로부터 “다시 다른 적금에 유치하면 특별히 연 2% 금리 혜택을 주겠다”고 권유했지만 유 씨는 거절했다. 그는 “월 30만 원씩 부어서 총액도 얼마 안 되니 차라리 우량주식을 사서 하루에 10만 원씩 버는 게 이득”이라며 “당분간 돈 묵히는 예·적금은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은행 자금 이탈 움직임은 숫자로도 드러난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시중은행 정기예금 잔액에서 13조9000억 원이 빠져나갔다. 한국은행이 10일 발표한 ‘1월 중 금융시장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시중은행 정기예금 잔액은 697조 원으로 지난해 12월보다 4조4000억 원이 줄었다. 증권계좌 투자자 예탁금이 지난달 고점(74조4559억 원)을 찍고 계속 60조 원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달 9일 기준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주요 시중은행의 정기예금도 630조9767억 원으로 지난해 12월 말(632조4074억 원) 대비 1조4307억 원 줄었다. 정기적금(37조3660억 원)도 전년 말(41조3212억 원)보다 3조9552억 원 감소했다.
지난해 여름까지 간간이 나오던 5∼6%대 고금리 특판 상품은 급여통장 이체, 전월 카드 실적 등 각종 조건들이 붙어 원성을 샀지만 이젠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5대 시중은행은 1월부터 특판 상품을 아예 내놓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1월 말 기준 은행 정기예금 평균 금리는 연 0.89%다. 1년 만기 정기예금에 1000만 원을 넣어도 세금을 떼고 손에 쥐는 이자가 7만 원대에 불과한 셈이다. 실제로 은행연합회에 공시된 1년 만기 정기예금 상품 49개 가운데 우대 금리를 일체 적용하지 않는 상품도 32개(65.3%)에 달한다.
만족할 만한 금리를 얻지 못한 고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도록 다양한 ‘당근’을 내놓는 곳도 있다. KB국민은행은 지난달 4일부터 이달 26일까지 만 19세 이상을 대상으로 모바일 뱅킹(KB스타뱅킹)을 통해 KB증권 주식계좌를 처음 개설하면 혜택을 준다. 개설 축하금 5000원을 지급하고 온라인 주식 위탁거래 수수료 혜택을 제공하는 등 은행 자금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이벤트를 열고 있다. ‘동학개미’로 불리는 개인 투자자들의 수요를 흡수하면서 은행 고객을 잃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카카오뱅크는 지난달 20일부터 예·적금 금리를 0.2%포인트 올린다고 밝혀 시장의 이목을 끌었다.
다만 개미들의 머니무브에도 은행들은 아직 자산가들의 거액 예금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 안도하고 있다. 한 은행 PB센터 관계자는 “자산가들도 주식이 활황이어서 관심은 갖지만 예금을 헐어 투자에 뛰어드는 분들은 극히 드물다”고 전했다. 지난해 10월 KB금융 경영연구소가 발간한 ‘2020 한국 부자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한국 부자들의 금융자산 포트폴리오 가운데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59.2%였지만 주식은 14.5%에 그쳤다. 자산 세부구성비 역시 ‘예·적금’(9.3%)이 ‘주식·리츠·상장지수펀드(ETF)’(5.8%)보다 앞섰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규제가 강해지면서 주택을 매각하고 금융으로 자본을 이동하는 흐름까지 거세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삼성전자나 LG화학 같은 대장주들이 은행 적금 대신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며 “저금리 기조가 계속되면 자연스럽게 은행은 예·적금 같은 수신 업무보다 대출상품 판매 창구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