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퇴직한 A 씨는 LH 후배들과 수시로 만난다. 지난해 LH 전·현직 직원 모임에서 한 후배가 “중장기적으로 유망한 토지가 있다”고 하자 모임에 참석했던 ‘OB(올드보이)’ ‘YB(영보이)’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땅 매입 시 감수해야 할 리스크보다 기회가 크다는 데 참석자 대부분이 동의했다. A 씨는 대출 금융기관을 알아보고, 후배들은 입지 분석을 맡을 계획을 세웠다.
‘LH 투기 의혹’의 이면에는 이처럼 전직과 현직들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직접적으로 개발 정보를 활용하지 않더라도 이들이 토지 전문가로서 평생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개인적인 재산 증식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 실명 안 남기려 퇴직자가 세운 법인 통해 투자
토지 전문 부동산업체 관계자는 “정부의 LH 투기 의혹 조사에서는 실명 투자만 살펴본다고 하는데, 개인 명의로 땅을 투자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퇴직자가 법인을 설립하고, 현직 직원들의 출자를 받은 후 토지를 매입하는 사례도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하면 거래 기록에는 법인명만 남고 직원들의 이름은 남지 않는다. 차명 거래 같은 비합법적 방식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법인을 통해 토지 거래를 하면서 감시망도 피할 수 있다. 정부 합동조사로는 LH 전·현직 직원이 함께 땅을 매매한 사례를 모두 가려내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부동산업계에서는 신뢰가 중요한 땅 매입에서 직장 동료끼리 공동으로 돈을 모아 토지를 사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본다. 한 컨설턴트는 “토지는 대부분 친인척과 투자하고, 남남이면 서로 근저당권을 설정하는 등 일종의 ‘보증’을 서놓는다”며 “LH 직원들의 공동 매입이 많다는 건 그만큼 LH 내 토지 투자가 성행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LH가 더불어민주당 박상혁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투기 의혹을 받고 있는 LH 직원 13명 중 12명은 입사 30년 차 이상(1984∼1992년 입사)으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1, 2기 신도시 개발 과정을 보며 노하우를 습득한 이들이 토지 보상 경험 등의 정보를 공유하며 신도시 땅 매입에 나선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적지 않다.
○ “술자리에서 ‘여기 사라’ 찍어주기도”
LH 내부 분위기는 자신들의 땅 매입은 정당한 투자일 뿐 투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LH 직원이 술자리에서 경기도 한 지역의 땅을 사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냥 흘렸는데 나중에 실제로 택지로 발표돼 놀란 적이 있다”고 전했다. 이 LH 직원은 회식 자리에서 부서 상급자가 ‘재테크를 잘해야 한다’며 자신이 산 땅을 알려주면서 돈이 있으면 꼭 사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LH는 오랜 기간 조직생활을 하다 보니 일반 직장보다 관계가 끈끈하고, 퇴직해도 전·현직 직원 간 모임이 많다”며 “과거에도 LH가 개발한 땅에 청약해 당첨된 직원들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보를 공유하고 ‘같이 하자’는 얘기도 나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과거 신도시 보상 업무에 관여했던 한 감정평가사는 “과거 1, 2기 신도시 때 감정평가를 나갔더니 LH 직원이 ‘가족이 산 땅’이라며 잘 봐달라고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며 “그 같은 일이 지금까지 관행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LH 전·현직 직원들의 끈끈한 관계는 부동산업계에서 유명하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전했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LH 퇴직자들이 용역회사를 설립해 LH가 발주한 각종 사업에 지원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며 “퇴직자 모셔가기가 치열해 고액 연봉에 차량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전·현직 직원들이 정보를 공유하며 각종 개발사업의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이번 일은 LH가 사실상 토지 개발을 독점하고 ‘갑’의 지위를 누리면서 벌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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