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 배터리 시장에 대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히면서 배경에 이목이 쏠린다. 확대되는 미국 시장을 선점하려는 게 주된 목적이지만,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겪은 SK이노베이션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의도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 12일 LG에너지솔루션은 2025년까지 미국 내 배터리 시장에 5조원 이상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현재 5기가와트(GWh)인 미국 내 자체 배터리 생산능력을 75GWh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현재 1공장을 건설 중인 GM과의 배터리 합작법인도 올해 상반기 안에 2공장 투자를 결정할 방침인데, 여기까지 완공되면 LG에너지솔루션의 미국 내 생산능력은 140GWh까지 높아진다. 지난해 전세계에서 판매된 전기차 배터리의 총 용량이 142.8GWh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LG에너지솔루션은 현재 전세계 공급량과 맞먹는 배터리를 미국 안에서만 생산하게 된다는 얘기다.
이번 LG에너지솔루션의 투자 결정은 미국 배터리 시장의 선점을 위한 것이지만, 일부에선 최근까지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겪은 SK이노베이션을 겨냥한 측면도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된다.
현재 대대적인 전기차 확대 정책을 펴는 미국 정부는 필수 부품인 배터리 수급이 난제인 상황인데, SK이노베이션은 조지아주(州)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건설 중이다. SK이노베이션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패소 판결에 따라 미국 내 사업을 하지 못하게 되면 미국 정부 입장에선 전기차 확대 정책에 타격이 크니, 바이든 대통령이 ITC 판결에 거부권을 써 SK이노베이션을 구제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날 LG에너지솔루션이 그동안 조지아 공장에 대한 SK이노베이션의 투자 규모(3조원)를 넘어서는 5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히면서 바이든 대통령의 셈법도 복잡하게 됐다는 의견이 많다.
특히 그동안 SK가 바이든의 거부권 행사를 주장하며 내세웠던 논리인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대해서도 LG에너지솔루션은 “공장 완공시 LG가 직접 고용하는 인원만 6500명”이라고 밝혔다. 미국 정부 입장에선 SK이노베이션이 더 이상 ‘최우선’이 아니게 된 셈이다.
오히려 ITC 판결이 유지되고 양측이 합의에 실패해 향후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내 사업이 어려워진다면, 미국 입장에선 막대한 배터리를 당장 수급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사실상 LG에너지솔루션이 유일하다는 점도 바이든 행정부의 고민을 깊게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한국 등 해외 배터리 기업으로부터 최대한 투자를 유치해야 하는 미국 정부는 LG의 입장도 살펴야 하기에 어느 한쪽 편만 들어주기가 어렵게 됐다는 게 중론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행정부 입장에서 그동안 LG는 SK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졌지만, 이젠 SK와 동등한 입장에서 ‘ITC 판결을 그대로 유지하게 해달라’고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LG에너지솔루션의 투자 발표가 SK이노베이션과의 합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난 11일 SK이노베이션은 LG에너지솔루션에 새로운 협상 조건을 제시하고, LG 측도 이를 검토했다고 밝힌 바 있다. 업계는 SK이노베이션이 그동안 제시했던 합의금 수준보다 조금 더 상향해 제안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양측의 힘겨루기가 치열한 상황에서 이번 LG에너지솔루션의 투자 계획 발표는 SK이노베이션으로 하여금 협상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SK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LG는 이번 투자 발표를 통해 미국에 진출하려는 완성차 업체들에게 ‘현지에서 안정적인 배터리 공급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주는 데 성공했다는 해석도 있다. 결국 SK가 소송 리스크로 발이 묶인 사이에 미국 배터리 시장을 선점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까지 양측의 협상에서 최대 관건은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라며 “아직도 양측의 입장 차이가 큰 것으로 보이는데, 다음달 중순에 거부권 행사 시한이 지나면 합의가 크게 진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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