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EU ‘반도체 脫아시아’ 패권 전쟁 포문 열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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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 “반도체 위탁생산 시장 진출”

“인텔의 입을 빌린 미국 정부의 반도체 패권 전쟁 선언이나 다름없다.”

24일 인텔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 진출 발표 직후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같이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 첨단 반도체 공급 주도권이 급격하게 대만 TSMC, 한국 삼성전자로 쏠리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PC 시대의 반도체 왕좌인 인텔을 ‘부활’시켜 반도체 경쟁력을 되찾아오겠다는 구상”이라고 분석했다.

인텔이 진출을 선언한 파운드리 시장은 2025년 1000억 달러(약 114조 원)로 급격한 성장이 점쳐지는 신흥시장이다. 이뿐만 아니라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 등 첨단 산업에 필요한 반도체 자급력은 단순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국가경쟁력’이자 ‘국가 안보’ 수준의 과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벌어진 전례 없는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는 미국 정부의 위기감을 키운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반도체 생산을 손놓고 있다간 국가 경제를 이끄는 대표 산업들의 생태계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인 셈이다.

실제 최근 스마트폰부터 자동차, 데이터센터 등 첨단 반도체가 들어가는 산업마다 ‘초유의 반도체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가 부족해 전체 완성차 공장을 세워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현실이 됐다. 시장정보업체 IHS마킷은 1분기 전 세계 자동차 생산량이 100만 대가량 지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전통 강대국들이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을 가진 대만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의 손만 바라보며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텔은 2016년 파운드리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가 2년 만에 철수했다. 그럼에도 24일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CEO)는 직접 “회사명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신규로 확보될 설비를 활용할 고객사가 다수 확보되었다”고 밝혔다. 성공 경험이 없는 신생 업체, 아직 첫 삽을 뜨지 않은 공장에서 생산될 고가의 반도체를 사겠다는 기업이 확보됐다는 뜻이다.

이는 인텔의 파운드리 시장의 발표가 미국 정부의 주도, 미국 정보통신기술(ICT) 업체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인텔은 이날 아마존, 시스코시스템스, 퀄컴,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텔의 칩 제조 발표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또 하드웨어 연구 인력 및 상당량의 특허를 보유한 IBM과 연구 협력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인텔 역시 “미국 바이든 행정부와 협력할 수 있어 기쁘다”라며 “미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유럽도 ‘탈아시아’, 즉 유럽 내 반도체 공급망을 세우기 위해 다양한 대안을 찾고 있다. 이달 초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10년간 유럽의 디지털 산업 전환을 가속화하겠다고 발표하며 2030년까지 EU의 글로벌 반도체 생산량 점유율을 최소 2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내놓았다. 2000년대 초반 24% 수준이던 EU의 반도체 생산량 점유율은 현재 10% 안팎에 불과하다.

미국, EU의 반도체 자급 행보는 삼성전자에 직접적인 위협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 대만 TSMC는 미국에 120억 달러(약 14조7500억 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삼성전자도 올해 미국 텍사스주 등을 중심으로 파운드리 생산시설 투자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미국 ICT 기업들의 물량을 두고 TSMC뿐 아니라 미국 토종업체 인텔의 견제라는 부담도 안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미국 정부, 미국 ICT 공룡들의 전폭적 지원을 등에 업은 인텔이 TSMC, 삼성전자가 양분하고 있는 파운드리 시장에 얼마나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날 인텔은 어떤 제품과 어떤 공정을 투자, 생산할지 공개하지 않았다. 인텔의 반도체 생산능력은 7나노 이하의 공정에 머무르고 있는데 TSMC, 삼성전자가 양산에 성공한 5나노 칩 생산까지 얼마나 시간 격차를 좁힐 수 있을지 미지수다. 비교적 양산이 쉬운 10나노대에 도전한다면 삼성, TSMC의 경쟁 상대라기보다는 유럽 기업들과 점유율 싸움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날 인텔이 발표한 투자금액 200억 달러(약 22조 규모)는 파운드리 업계 쪽에선 일반적인 투자 금액이기도 하다.

서동일 dong@donga.com·곽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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