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현대차그룹에서는 정의선 회장이 임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타운홀미팅 행사가 열렸습니다.
정 회장이 수석부회장이었던 2019년 10월에 열었던 행사 이후 두 번째 타운홀미팅이었는데요.
2019년의 첫 행사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 사옥 2층 강당에서 오프라인 행사가 진행되면서 동시에 그룹 계열사에 생중계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전면적인 온라인 생중계 방식으로 열렸습니다.
자동차, 건설, 제철, 금융 등의 사업을 거느리고 있는 현대차그룹은 사실 상명하복의 군대식 조직문화로 유명합니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그룹을 진두지휘하던 시절에도 소통을 위한 노력은 있었겠습니다만…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바탕으로 세계무대에서 공격적으로 시장을 넓히는 것이 지상 과제였던 시대였던 터라 임직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주 중요한 과제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기업을 구성하는 임직원들의 생각과 태도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첫 타운홀미팅에서 정 회장은 수석부회장을 줄인 ‘수부’ ‘수부님’이라는 친근한 호칭을 강조하고 직원들과 단체로 셀카를 찍었습니다.
아직 회장에 취임하기 전이었지만 CEO가 바뀌고 회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안팎으로 보여주는 자리였습니다.
밖에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 행사 이후에 현대차그룹 내부의 주요 사업 부문 곳곳에서도 비슷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고위급 임원들 각자가 임직원들의 의견을 듣겠다고 마련한 자리였고 어떤 곳에서는 고위 임원이 화려한 복장에 가발까지 쓰고 등장해서 편하게 얘기하자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비판적으로 볼 여지도 있겠지만, “바뀌어야 한다”는 CEO 뜻을 확인하자 신속하는 즉시 각자의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현대차그룹이 가진 원래의 ‘일사분란’한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임직원의 최대 관심사는 ‘성과급’
이번에 열린 두 번째 타운홀미팅 행사와 관련해 현대차그룹 내부적으로는 아무래도 성과급이 가장 큰 관심사였던 듯 합니다.
행사를 위해 사전에 질문을 모을 때도 성과급과 관련한 질의가 압도적이었다는 후문입니다.
성과와 보상 문제는 어느 기업할 것 없이 최대의 관심사이니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회사의 성과를 직원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으로 돌려주는 성과급을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최근 국내의 다른 주요 대기업에서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습니다.
다만, 현대차나 기아의 경우 성과급이라는 장치가 다른 기업들과 다소 다르게 작동해 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현대차와 기아에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노동조합을 상대로 회사가 임금협상을 벌일 때 영업이익의 크기를 감안해 성과급의 규모를 일괄적으로 결정하는 흐름이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회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탄력성이 낮은 기본급의 상승은 억제하면서 매년 탄력적으로 근로자들의 임금 총액을 조절하는 장치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워낙에 강력한 노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내부 사업부문 간의 성과 혹은 임직원 개인의 성과를 아주 크게 반영하는 제도도 아니었습니다.
임직원들 역시 이런 구조를 모르지 않겠습니다만,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현대차그룹은 이제 차가 잘 팔렸을 때 특정 사업 부문이나 개인에게 이득을 몰아주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누가 그 이득을 누릴 것인지 같은 문제까지 고민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조직 안에서 숫자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생산직 근로자의 입장과 양재동 본사, 남양연구소, 판매 조직 등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일 하는 근로자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복잡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 최고경영자가 직접 대외 메시지 발신하는 통로
이런 이슈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보여주듯이 타운홀미팅은 내부 소통용이라는 것이 현대차그룹의 설명입니다.
정의선 회장이 내부 임직원들과 직접 소통하고 대화하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을 밖에서 취재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타운홀미팅은 CEO인 정의선 회장을 간접적으로 인터뷰하는 자리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정의선 회장 같은 재계 주요 인사는 특정한 매체와 언론 인터뷰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두가 인터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특정 매체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그렇다고 문을 활짝 열면 너무 많은 매체를 마주해야 합니다.
언론 간담회를 열거나 일부 매체와 인터뷰 하는 대신 타운홀미팅 같은 행사를 열면 자연스럽게 공개되는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있습니다.
내부 행사니까 노출하고 싶은 부분까지만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습니다.
● 로보틱스에 대한 생각 직접 밝힌 정의선 회장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저는 이번 타운홀 미팅에서 로보틱스에 대해 정의선 회장이 직접 밝힌 내용들이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2019년 10월의 첫 타운홀미팅에서 정 회장은 현대차그룹이 미래에 자동차 50%, 도심항공모빌리티(UAM) 30%, 로보틱스 20%의 비중으로 사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현대차그룹 양재동 사옥에서 모니터로 생중계되는 영상을 보고 있던 기자들은 물론이고 현대차 직원들도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정 회장이 무슨 취지로 말하는 것인지를 몰라서 직원들마저도 약간 당황해 하던 장면도 기억이 나는데요.
현대차그룹의 미래에 대해 상당히 중요한 메시지를 임직원들 앞에서 먼저 꺼내놓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가운데 UAM과 관련한 계획들은 여러 차례 청사진이 제시됐습니다.
지난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0’에서는 현대차가 미국의 우버와 협력한다는 점 그리고 UAM 사업의 핵심이 될 비행체의 모형까지 공개가 됐습니다.
CES 행사장에서는 정의선 회장이 직접 발표자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로보틱스에 대해서는 정 회장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이 별로 없습니다.
● 정의선 회장 “로봇이 비서 역할하고 물리력도 보조”
이런 가운데 이날 정 회장이 로보틱스에 대해 밝힌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일단 로보틱스 부분이 산업이나 개인이나 의료 여러 부분에 적용될 거예요. 예를 들면 저는 폰이 없어지고 로보틱스를 항상 데리고 다닐 것 같구요. 로보트든 휴먼노이드든 어떤 형태로든 그리고 비서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것을 다 들어주고 그리고 집에 오면, 만약 고령자라면 차에서 침대까지 다 안아서 데려가고,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동안에는 알아서 충전을 하고 있을거고. 그리고 스케줄 관리부터 모든 걸 다하고 우리는 더 생산적이고 머리를 많이 쓰는 다른 일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어떤 미래가 그려지시나요?
로봇이 사람을 따라다니며 비서 역할도 하고 사람이 해야 할 물리적인 작업을 도와주는 모습. 어찌보면 그동안 만화와 영화 속에서 보던 로봇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걸 작가와 감독이 영화 속에 구현하는 것과 글로벌 기업의 CEO가 직접 얘기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사업모델로 드러나진 않고 있지만 현대차그룹의 로보틱스 사업이 미래에는 자동차 사업의 5분의 2 정도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지향점을 내놓은 이상 정의선 회장이 직접 얘기하는 로봇의 역할은 앞으로 내놓을 제품의 예시라고 봐도 될 듯 합니다.
공장 등에서 사람을 대신해서 생산 활동에 활용되는 ‘산업용 로봇’ 뿐만이 아니라 사람 가까운 곳에서 사람의 일을 대신하거나 보조하는 서비스 로봇 그리고 휴머노이드 로봇이 현대차그룹의 지향점이라고 분명히 말을 한 것입니다.
현대차그룹은 세계 곳곳의 생산 시설에서 많은 산업용 로봇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장의 근로자들에게는 근골격계 질환을 예방해주고 작업 편의를 높여주는 웨어러블 로봇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산업적인 수요뿐만이 아니라 일상 속의 개인들에게 어떤 로봇을 제공하고 싶은지를 정 회장은 이번에 얘기를 했습니다.
물론,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말 세계적인 로봇 기업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인수하기로 하면서 이와 비슷한 미래 계획을 어느 정도 공개했습니다.
시장 수요가 큰 물류 로봇을 시작으로 사람을 안내 및 지원하는 로봇, 인간형 로봇인 휴머노이드 로봇 등이 주요한 목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계획에 정 회장이 구체적인 얘기를 더하면서 현대차그룹의 로보틱스 사업은 조금씩 구체화하는 모습입니다.
● 자동차 공급 과잉의 시대
현대차 뿐만이 아니라 도요타나 혼다 같은 해외 자동차 기업들도 일찌감치 로봇 사업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왜 이런 새로운 사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정의선 회장 본인이 2019년 타운홀미팅에서 내놓았습니다.
당시 정 회장은 자동차 산업이 세계적으로 2500만 대 가량 공급 과잉 상태라고 진단했습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은 코로나19 사태 같은 변수가 없을 때 9000만 대 안팎의 시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 회장의 진단은 30% 가까운 과잉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분석인 셈입니다.
과잉 공급 상태는 완성차 제조사들 간의 치열한 경쟁을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고객들에게는 싼 값에 좋은 차를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조사의 입장에서는 생존 경쟁에 내몰리면서 수익성 낮은 사업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이러니 자동차 기업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에서 더 높은 수익성을 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움직임입니다.
2020년 444억 달러(약 50조 원) 규모로 추산되는 글로벌 로봇 시장은 연평균 32%씩 성장해 2025년에는 1772억 달러(약 200조 원) 시장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자동차 산업의 급변기에 어떤 기획 혹은 위기를 맞이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그리고 이미 자동차 산업 자체의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는 점 등이 자연스레 현대차그룹을 포함한 자동차 기업을 로보틱스의 세계로 이끌고 있는 셈입니다.
● 자동차 기업이 로봇 사업에 손 뻗는 이유는…
어떤 형태가 됐던 실용적인 로봇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결국 기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양한 영역의 기존 기업들이 경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기존의 로보틱스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중장비 기업, 전자 기업, 정보통신(IT) 기업 등 다양한 산업군의 기업들이 여기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다.
이 가운데서 자동차 기업이 가진 장점은 뭘까요.
일단 많은 로봇이 기본적으로 이동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전기를 중심으로 동력을 이용해 이동하고 물리적인 힘을 쓴다는 점은 자동차, 특히 전기차와 비슷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자동차 업계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하고 있는 자율주행 기술 역시 이동성을 가진 로봇이 갖춰야할 능력과 유사합니다.
주변을 최대한 정확하게 감지하면서 스스로 목적지로 이동하고 위험한 상황은 회피해야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정의선 회장이 말한 ‘쉴 때는 알아서 충전하는 로봇’이라는 개념을 들여다보면 자율주행 전기차가 추구하는 개념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미래의 자율주행차를 ‘사람을 태우고 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는 로봇’으로 정의해 본다면 어떨까요?
다양한 종류의 로봇을 ‘사람을 직접 태우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곁에서 필요에 따라 이동하며 아주 다양한 일을 물리적으로 처리해 주는 기계 장치’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산업 전반적인 측면에서도 강점이 있습니다.
자동차 산업은 제조업 분야에서 ‘종합예술’이라고 불릴 정도로 복잡한 산업입니다.
부품 수급, 생산, 판매, 운송, 재고 관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종합적인 역량을 잘 조화시켜야 하는 산업이고 주요 기업들의 경우 몸집 자체도 큽니다.
로봇 산업 역시 산업용 로봇, 물류 로봇, 서비스 로봇, 휴머노이드 로봇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정밀한 제조 기술까지 갖춰야 하는 첨단 산업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로봇을 ‘대량 생산’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자동차 산업의 주요 기업들은 가장 적합한 능력을 갖춘 곳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로봇은 자동차에 비해서는 작고 가벼울 수 있지만 스마트폰이나 TV에 비해서는 훨씬 크고 무거울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도 비슷한 부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 2021년 한국 기업의 고민, 인재 확보와 신사업
일부러 타운홀미팅 같은 행사를 열어서 성과급 같은 민감한 주제에 대해 개선책을 내놓겠다고 약속하고 로보틱스처럼 아직 불확실한 미래 사업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저는 이번 타운홀미팅 행사를 보면서 현대차그룹뿐만이 아니라 한국 주요 기업들이 2021년에 가진 고민을 잘 보여주는 자리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권위주의 시대가 저물고 CEO가 직접 나서서 새로운 세대의 임직원과 소통하고 적절한 보상까지 약속해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사업은 고객을 바라보며 하지만 제품을 사줄 고객뿐만이 아니라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회사 내부의 고객, 곧 임직원들부터 만족시켜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기업이 수십 년 동안 빠르게 성장해 온 결과, 이제는 글로벌 기업들에 뒤지지 않는 혹은 더 앞선 제품을 만들면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해 성공시켜야 현재의 기업 규모와 수익을 유지·발전시킬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현대차그룹을 포함해 한국의 많은 기업이 처한 상황입니다.
전기차와 수소차 같은 친환경차와 자율주행차에 대응하는 투자. 그리고 UAM에 로보틱스까지.
현대차그룹의 경우 관심과 투자가 너무 넓게 퍼져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의 시선도 있습니다.
전기차를 비롯한 친환경차 관련 사업이 상당 기간 동안 기업에 수익을 주기보다는 추가적인 투자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도 이런 우려에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보틱스를 포함한 현대차그룹의 새로운 시도는 앞으로 어떤 결과를 보여줄까요?
정의선 회장과 임직원들이 만난 자리에서 오고간 많은 얘기와 약속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따라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 다양한 미래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현대차그룹 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 기업들이 비슷한 고민 속에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는 2021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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