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국가안보 차원에서 접근… 삼성 등과 회의소집 선제 대응
靑, 뒤늦게 기업들과 접촉 나서, “文대통령 직접 현장 방문도 검토”
전문가 “단기 수급문제로 봐선 안돼
국가간 대결, 범부처 차원 나서야”
지난달 4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등 국내 자동차 및 반도체 업계의 임직원 10여 명이 모였다. 최근 세계적으로 심각해진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미래차-반도체 연대·협력 협의체’ 첫 회의였다. 1시간 반가량 진행된 이 회의는 산업통상자원부의 강경성 산업정책실장(1급)이 주재했다. 청와대나 외교부, 교육부 등 다른 부처 관계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반면 중국과 반도체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분위기는 긴박하다. 백악관은 이달 12일 국가 안보와 경제 담당 보좌관들이 참석하는 반도체 수급 대응 긴급회의를 열고 삼성전자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을 소집할 예정이다. 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이 반도체를 자국 산업에 타격을 줄 안보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등이 대대적인 예산을 투입하며 미래 반도체시장 선점 경쟁에 나섰는데, 한국은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반도체 대란’에 산업부, 한 달 만에 2차 회의
5일 산업부와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달 미래차-반도체 연대·협력 협의체를 발족하고 첫 회의를 한 지 약 한 달 만인 이달 7일 강 실장이 주재하는 2차 회의를 연다. 정부는 지난달 10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BIG3(미래차·시스템반도체·바이오헬스)’ 회의를 열고 1차 협의체 회의에서 거론된 △수입 절차 간소화 △차량용 반도체 성능평가 지원 등 반도체 공급 부족에 대한 단기 조치를 내놨다. 이에 대해 업계에선 정부가 단기적인 반도체 수급 문제에만 집중하고 중장기 대책엔 소홀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가 이날 회의에서 내놓은 중장기 대책은 차량용 반도체·부품 자립화를 위한 연구개발(R&D)에 2020∼2022년 2047억 원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다. 올 2월에는 시스템반도체 연구개발에 향후 10년간 2조5000억 원을 투입한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투자 규모는 미국, 중국에 비해 미미하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지난달 31일 500억 달러(약 56조 원) 규모의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밝혔고, 중국은 2015년부터 10년간 1조 위안(약 170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은 약 530조 원 규모로 전망된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등 미래 기술의 핵심 경쟁력인 반도체 수급 문제는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다른 주요 핵심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장 국내에서도 현대차 울산1공장에 이어 쏘나타와 그랜저를 생산하는 현대차 아산공장은 차량용 반도체 부족 탓에 휴업을 검토하고 있다.
○ 청와대 “관련 기업 방문 검토 중”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를 ‘21세기 편자의 못’이라고 선언하고,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추진하자 청와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관련 기업을 방문해 반도체 문제를 논의하는 일정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또 청와대 정책실을 중심으로 삼성전자 관계자들과 조만간 만나 관련 대응 방안을 논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와 학계에선 정부와 청와대가 반도체 강국이라는 현재에 안주해 미중의 움직임에 반 박자 느리게 대응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019년 일본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수출 규제 당시 문 대통령이 앞장서고 당정청이 한목소리로 대응하던 것에 비하면 감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A 기업 관계자는 “미국이 반도체 새판 짜기에 적극 나선 상황에서 정부가 민간과 장기 로드맵을 공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장은 “과거 반도체 산업이 기업 간 경쟁 구도였다면 앞으로는 국가 간 외교전이 펼쳐지는 전쟁터”라며 “연구개발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외교부가 미중 사이에서 적절한 외교 전략을 세우며, 교육부가 인력 양성에 나서는 식의 범부처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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