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방부가 펴낸 국방백서에 따르면 군이 운용 중인 헬기는 680여 대에 이른다. 한국 영토와 영해를 지키기 위해 곳곳을 누비는 이들 헬기는 주기적으로 ‘긴 잠’에 빠진다. 정기적으로 정비창에 들어가 동체를 부품 단위까지 해체한 뒤 다시 조립하는 ‘창정비’에 들어간다. 한번 시작하면 몇 달씩 발이 묶인다. 엔진 동력을 회전날개에 전달하는 장치인 ‘기어박스’의 정비는 국내에서 할 수 없어 해외에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국산 헬기인 수리온(사진)을 비롯해 군 헬기에 사용되는 기어박스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헬기와 항공기에 사용되는 기어박스는 빠른 회전을 견디면서 가벼워야 하고 공간도 적게 차지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기계 기술이다. 항공기 엔진을 개발한 국가는 많아도 항공기용 기어박스를 만드는 국가는 미국과 프랑스 등 극소수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항공기용 기어박스를 국산화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방위사업청은 지난해 12월 수리온의 기어박스를 국산화해 성능을 높이는 발전방향을 발표했다. 엔진은 미국산을 우리가 개량해서 쓰는데 기어박스가 엔진 성능을 감당하지 못해 출력을 87%로 제한하는 상황이다.
군과 과학계는 차세대 고기동 헬기 개발을 추진하면서 기어박스 기술을 함께 확보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국기계연구원과 육군항공학교는 지난달 31일 차세대 고기동 헬기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고 일반 헬기의 항속인 시속 250km보다 빠른 시속 400km로 나는 헬기를 개발하면서 기어박스도 국산화하기로 했다. 이근호 기계연 스마트산업기계연구실 책임연구원은 “국방과학연구소와 3년간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연구를 진행했고 올해부터 설계에 돌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기어박스는 소재와 부품 기술의 집약체라는 점에서 기술 확보만 한다면 파급효과가 크다. 기어박스 속에는 톱니바퀴 모양의 기어와 동력을 전달하는 축, 기어와 축을 연결하는 베어링, 마찰을 줄이는 윤활장치 등 기계장비에 필수인 부품들이 촘촘히 배열돼 있다. 항공기 기어박스에 쓰이는 부품은 얇으면서도 가볍고 2만 rpm(분당회전속도)이 넘는 출력을 견뎌야 할 만큼 높은 강도를 유지해야 하는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하다. 무게만 수 t에 이르는 헬기를 하늘로 들어올리는 기어는 5μm(마이크로미터·100만 분의 1m)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정밀한 설계와 가공 기술을 필요로 한다.
기계연은 올해부터 양산 예정인 한국형 중고도무인정찰기(MUAV)의 기어박스 개발 경험을 살려 기술 확보에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기어를 수평이 아닌 다른 각도로 맞물리게 하는 ‘베벨기어’나 고성능 베어링 같은 부품은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소재 강국이 독점하고 설계도 전혀 공개하지 않는 기술이다. 이 책임연구원은 “국내에서 기초부터 차분히 실력을 쌓아 독자적인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헬기 기어박스를 국산화하고 국내에 공급 사슬을 구축하면 국내 부품기술을 고도화하는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난달 산업통상자원부는 ‘제3차 항공산업발전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기어박스를 국산화할 경우 향후 30년간 4조1000억 원의 파급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추산했다. 이 책임연구원은 “한국은 설계와 해석 분야는 이미 선진국의 95%까지 올라왔다”며 “앞으로 차분히 요소기술을 개발하면 충분히 국산화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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