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말끔한 회색 양복을 입은 남성이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종이엔 큼직하게 ‘아파트 20년 시프트 특별공급’이란 글씨가 적혀 있다. 지나가던 어르신이 “진짜냐”며 관심을 보이자 남성은 “입주 경쟁도 필요 없다”며 한참 설명하더니 “사무실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권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현직 직원의 투기 의혹 등 부동산 논란이 거센데도 집 없는 서민들의 쌈짓돈을 노린 이른바 ‘기획부동산 업체’들이 대낮 도심에서까지 활개치고 있다. 특히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뒤 ‘시프트 재활성화’가 관심을 끌자, 이를 미끼로 유혹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다. 경찰과 서울시 등은 “위법 소지가 크니 절대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 철거민 특별공급 노린 편법 기승
“늦어도 내년 여름이면 입주권이 나와요. 법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니까.”
19일 ‘100% 시프트 보장’을 약속하는 한 업체 사무실을 찾아갔다. 상담을 맡은 직원은 곧장 서울 금천구에 있는 한 주택 매입을 꼭 짚어 추천했다. 그는 “구청에서 조만간 공영주차장을 조성하는 땅”이라며 투자를 꼬드겼다.
“큰돈도 필요 없어요. 딱 1억5000만 준비하셔. 인기가 좋아 물량도 몇 안 남았어요. 우리 사장님, 부동산업계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알아요. 관에서 어렵사리 빼낸 정보라니까. 원하시는 지역을 말씀만 하세요. 시프트 입주는 서울 어디든 가능해요.”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이런 기획부동산들이 가장 많이 내미는 게 이 같은 ‘철거민 특별공급’ 물량이다. 서울시는 2008년부터 도시계획사업으로 철거된 주택의 소유자가 무주택자일 경우 SH에서 운용하는 시프트 입주권을 제공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업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며 철거가 예정된 주택 매입을 주선한다.
최근 기획부동산들이 ‘시프트 장사’에 열을 올리는 건 여러 이유가 있다.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아파트 분양권 불법 전매 단속이 심하다보니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셈이다. 직접적인 피해가 잘 드러나지 않다 보니 그간 서울시나 SH가 소극적으로 대응한 측면도 없지 않다. 시 관계자는 “관련 피해를 접수한 수사기관이 협조 요청을 하면 자료를 제공하지만 직접 단속에 나서진 않고 있다”고 전했다.
● 특수본 “똑같은 투기…단속 대상”
본질적인 문제는 이들 말대로 하더라도 시프트 입주권을 얻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SH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철거민 특별공급 물량은 2018년 50가구와 2019년 9가구에 이어 지난해 34가구뿐이었다. SH 관계자는 “정식 주민열람공고가 뜨기 전엔 도시계획사업은 절대 확정되지 않는다. 기획부동산만 믿고 주택을 샀다간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시민들이 기대 심리를 갖고 건물을 사는 게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경찰은 기획부동산이 불확실한 정보를 과장하는 건 사기죄 적용 등이 가능하다고 봤다. 경찰 관계자는 “토지 지분 거래 자체가 불법은 아니어도 개발 호재를 부풀려 토지를 쪼개 판매하면 불법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정부 합동특별수사본부(특수본)도 같은 입장이다. 특수본 관계자는 “철거민 특별공급을 악용한 기획부동산 업체는 사안에 따라 공인중개사법 위반, 사기 등 위법 소지가 적지 않다. 이들 역시 부동산 투기 단속 대상”이라고 밝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