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연출·주연 ‘글로벌 반도체 희극’
● 정의용 “우리가 도울 수 있다”
● 정부에 협조하라는 은근한 압력?
● 바이든發 ‘반도체 공급망 재편’
● 삼성전자, 美中 양자택일 압박
● 美 투자, 파운드리 담금질 전략
● 여권은 대미 히든카드인 양 흔들어
이것은 반도체를 둘러싼 한 편의 글로벌 희극이다. 연출 및 주연은 문재인 정부, 투자 및 조연은 삼성전자다. 주인공의 상대역은 미국과 일본이다. 약 20개월의 시차를 둔 두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4월 21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점을 미 측에 강조했다”고 말했다. 백신 수급 방안으로 미국과 반도체 협력을 논할 수 있다는 전망이 회자될 시점이다. 그 다음 말이 의미심장하다. “바이든 대통령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분야도 많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미국 측과 협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 경제의 심장
묘한 기시감이 든다. 이번에는 2019년 8월 12일. 김현종 당시 국가안보실 2차장은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와 “일본이 우리에게 의존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했다. 아베 신조 내각이 한국으로의 반도체 부품소재 수출에 대한 규제 조치를 단행한 직후다. 역시 다음 말의 무게감이 남다르다. “D램의 경우 우리의 시장점유율이 72.4%다. D램 공급이 2개월 정지될 경우 세계에서 2억3000만 대의 스마트폰을 만드는 데 차질이 생긴다. 우리도 그런 카드가, 옵션이 있다.”
4월 23일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꺼낸 말을 빌면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심장”이다. 이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4월 22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산업 의존도 요인 분해를 통한 우리 경제 IT산업 의존도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반도체 수출액은 지난 2019년 968억 달러로 집계됐다. 전체 수출액(5422억 달러)에서 차지하는 의존도(통관 수출 내 산업 비중)가 17.9%다.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의존도는 2009년 9.0%에서 10년 만에 8.9%포인트 급등했다.
정확히는 메모리 반도체가 한국 경제를 지탱한다. 반도체는 메모리와 비메모리(시스템)로 나뉜다. 메모리 반도체 중 램(RAM)은 정보를 읽고 수정하는 역할을 한다. 램은 정보 저장 방식에 따라 D램과 S램으로 갈린다. 다만 D램과 S램은 전원이 꺼지면 기억된 정보를 모두 잃는다. 이 약점을 보완해 주는 게 롬(ROM)이다. 롬의 일종인 플래시 메모리(Flash Memory)는 전원이 끊겨도 데이터를 보존한다. 이는 다시 칩 내부의 전자회로 형태에 따라 낸드플래시(Nand Flash)와 노어플래시(Nor Flash)로 나뉜다.
D램과 낸드플래시가 메모리 반도체의 양대 지주다. 스마트폰이나 PC 등 IT 기기에서 D램은 속도를, 낸드플래시는 저장을 책임진다. 반도체업계에서 즐겨 쓰는 비유대로라면 D램은 책상이고 낸드플래시는 책꽂이다.
삼성전자는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의 패권 기업이다. 3월 5일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0년 4분기 매출 기준으로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42.1%로 집계됐다. 2위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은 29.5%였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점유율 32.9%를 기록해 역시 1위였다.
최근 성적표도 ‘수’다. 4월 29일 삼성전자는 지난 1분기에 연결기준 매출 65조3885억 원, 영업이익 9조3829억 원을 벌었다고 밝혔다. 전년 동기와 비교해 매출은 18.2%, 영업이익은 45.5% 늘었다. 같은 기간 반도체 부문만 떼어놓고 보면 영업이익(3조3700억 원)은 16% 줄었다. 다만 미국 텍사스주 한파에 따른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 가동 중단과 경기 평택 공장(P2) 개선을 위한 설비 투자비가 늘었다는 변수가 있었다.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반도체 부문은 2분기부터 원가구조 개선과 평택 2공장 가동에 따른 실적 개선 본격화가 기대된다”고 했다.
메모리 반도체와 식민지의 역습
1980년대 운동권 중에는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사고 구조에는 민족주의의 자국이 짙게 묻어 있었다. 세력을 지칭하는 낱말도 NL(민족해방)이었다. 반미·반일은 NL 운동의 망탈리테(mentalite´s·집합적 무의식)로 작용했다. 앞서 접한 정 장관과 김 전 차장의 말대로라면 한국은 미국을 경제적으로 돕고 일본에는 역(逆)보복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 삼성전자의 메모리 반도체를 통해서 말이다. NL 운동권의 시각에서 보면 재벌 기업이 선봉에 선 ‘식민지의 역습’이다.
의문은 여기부터다. 반도체 사업의 주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정부가 직접 반도체를 팔고 말고 할 권리가 없다. 즉 정 장관과 김 전 차장의 발언은 논란을 빚을 소지가 크다. 전략적으로도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자칫 본질은 사라지고 ‘시장 개입’ 따위의 해묵은 철학 논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전선이 넓어지면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려워진다.
김 전 차장 발언의 경우, 고민정 당시 청와대 대변인(현 민주당 의원)이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고 해명했다. 정 장관은 김 전 차장보다는 노련했다. 그는 “(반도체는) 민간기업이 주도하는 것이라 정부가 나서서 미 측과 협의 대상으로 할 수 없다”고 전제를 달았다. 이번에도 다음 말이 의미심장하다. “민간기업의 협력 확대가 미국 조야로부터 ‘(백신이 부족한) 한국에 도움을 줘야겠다’는 여론 형성에 상당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의 구성 방식이 전형적인 미괄식이다. 정부에 협조하라는 은근한 압력처럼 들릴 소지가 있다.
정 장관은 외교부에서 통상국장, 통상교섭조정관을 지낸 통상 전문가다. 논란 가능성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말을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 미국을 상대로 받을 건(코로나19 백신) 있는데 줄 게 없다. ‘쿼드’(Quad·미국, 호주, 인도, 일본 4개국 안보협의체) 참여가 미국을 움직이는 지렛대가 될 수 있지만, 문재인 정부는 적극적이지 않다.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남는 카드는 반도체밖에 없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고 있는 점도 고려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세기의 패권국 미국은 자유무역을 통해 글로벌 공급망(Supply Chains)이라는 경제질서를 빚어냈다. 기업은 저비용 고효율을 충족해 줄 거래처를 찾아 부지런히 국경을 오가기 시작했다. 한국도 일본산 부품·소재를 들여와 중간재를 만들어 미국·중국 등에 수출해 돈을 벌었다. 그런데 바이든 정부는 중국을 배제하기 위해 글로벌 공급망의 틀을 바꾸려 한다.
文 대통령의 訪美 선물?
바이든 대통령은 4월 12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삼성전자 등 19개 반도체·자동차·IT 기업 경영진을 초청해 화상회의를 열고 “미국은 20세기 세계를 주도했고 21세기에도 다시 세계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손에 반도체 핵심 소재인 웨이퍼를 들고 “내가 여기 가진 칩, 이 웨이퍼, 배터리, 광대역, 이 모든 것은 인프라”라고 말했다. 미국에 투자하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한 셈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자동차의 전자화 등 반도체 수요는 계속 늘 수밖에 없다. 미국도 반도체 라인이 (자국에) 생기면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돼 장기적 차원에서 좋다”고 했다. 이어 “당장 (공장을) 짓는다 해서 제품이 나오는 건 아니나, 바이든 대통령 임기 중에는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 주요 스마트폰 업체들이 고객사여서 수출 비중도 높다. 글로벌 산업에서 양강을 형성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미국 정부와 삼성전자 간 ‘반도체 게임’에 여권도 플레이어로 참여하려 무던히 애쓴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10일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반도체와 배터리 등 우리의 핵심 주력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주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분야도 많이 있다”는 정의용 장관의 발언과 결이 통한다. 민주당은 4월 23일 반도체기술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특위 위원장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임원 출신인 양향자 의원이 맡았다. 여권 일각은 문 대통령이 5월 21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투자 카드를 활용해야 한다는 조언까지 내놓고 있다.
이러면 삼성전자는 곤혹스러워진다. 삼성전자는 미국 현지에 170억 달러(약 20조 원)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추가로 건설하기 위해 막판 검토를 하고 있다. 미국의 각 주 정부를 상대로 세제 혜택 등 인센티브 규모를 놓고 협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생산시설이 있는 텍사스주 오스틴이 유력 후보지로 꼽힌다.
하지만 이는 이미 지난해부터 삼성전자 내에서 검토됐던 사안이다. 다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 등 대외 리스크 탓에 투자 결정이 늦어졌을 뿐이다. 재계는 문 대통령의 방미(訪美)에 맞춰 삼성전자의 투자 결정이 최종적으로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마치 모양새가 ‘방미 선물’이 돼버린 꼴이다. 삼성전자 처지에서는 이 부회장 사면 등 ‘정무적 판단’을 아예 무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일단은 말을 아낄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반도체가 최근 ‘핫 이슈’이고 또 우리 측 반도체 사업장이 미국에 있다 보니 그런 말(문 대통령 방미에 맞춰 투자 결정이 이뤄질 수 있다)이 나온다”면서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아직 섣불리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위기론
이 와중에 삼성전자 위기론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메모리 반도체보다 시장규모가 두 배가량 큰 게 시스템 반도체 시장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와 위탁 생산을 맡는 ‘파운드리’로 나뉜다. 파운드리 분야의 패권은 대만 TSMC가 쥐고 있다. TSMC는 지난 1분기에 매출 129억 달러(약 14조5000억 원), 영업이익 53억6000만 달러(약 6조 원)로 역대 최고치의 실적을 거둬들였다. 삼성전자보다 매출은 4조 원 이상 적은데 영업이익이 2배 가까이 높았다. 그만큼 수익성이 돋보인다는 뜻이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파운드리에서 성과를 증명하는 것이 미션”이라며 “기존 주력 사업인 메모리나 스마트폰, OLED보다는 파운드리나 M&A 같은 새로운 동력이 삼성전자에 필요하다. 투자자들이 기대하는 모습은 메모리의 제왕을 넘어 TSMC와의 격차를 좁혀가는 위협적인 파운드리 플레이어”라고 분석했다.
삼성전자가 미국에 파운드리 공장을 추가로 건설하려는 까닭도 여기 있다. 미래 먹거리인 파운드리 시장을 넋 놓고 TSMC에 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세계의 문법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이를 두고 “우리가 도와줄 수 있다”며 대미 히든카드인 양 손에 쥔 채 흔든다. 이것이 글로벌 희극이라는 사실을 문재인 정부만이 애써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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