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위원회인 ‘전력정책심의회’는 국민 생활과 밀접한 국가 전력수급 전망과 계획을 심의하는 역할을 한다. ‘행정기관 소속 위원회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전력정책심의회 같은 정부 위원회들은 현황과 활동 내역서 등을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공개해야 하는데, 이 위원회 명단이나 회의 내용은 홈페이지 어디에도 올라와 있지 않다. 정부가 별도로 알리지 않는다면 누가 위원회에 참여하며 회의는 몇 번이나 하고 심의는 제대로 하는지 알기 어렵다. 최근 전력정책심의회 회의에 참석한 A 위원은 “정부가 회의에서 두꺼운 자료를 주고 2시간 만에 정책의 가부를 결정하라고 하니 제대로 검토하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정부가 정책 심의 등을 명분으로 설치한 위원회가 역대 최대인 600곳에 육박하고 있다. 활동이 없거나 저조한 ‘식물위원회’와 위원 명단이나 내용을 알리지 않는 ‘깜깜이 운영’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30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정부가 설치한 행정기관 위원회는 지난해 12월 기준 593곳으로 역대 최대로 늘었다. 이 가운데 121곳(20.4%)은 작년 1년간 회의를 열지 않거나 한 번 열었다. 회의를 한 번도 열지 않은 위원회도 58곳(9.7%)이었다. 10곳 중 1곳꼴로 회의를 1년에 한 번도 열지 않은 사실상 ‘식물위원회’로 전락한 것이다.
정부가 위원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세금만 낭비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행정기관 위원회 1곳당 평균 예산은 지난해 6월 말 기준 5430만 원으로, 중앙노동위원회 등 5곳은 10억 원을 초과하는 예산이 편성돼 있다.
임기말 정부 위원회 난립… 회의 내용 안알리고 ‘깜깜이 운영’도
文정부 3년 반 만에 37개 증가 청년위원회, 상당수가 친정부 인사… 원안위는 원전 운영허가 지연 논란 정권초 화려하게 출발한 4차위, ‘곧 사라질 위원회’ 찍혀 겉돌아 전문가 “위원회 총량제 강제해야”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4차위)’ 직원 B 씨는 최근 고민이 늘었다. 4차위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특정 부처 한 곳에서 다루기 힘든 4차 산업 정책을 조정하고 혁신 방안을 구상하기 위해 2017년 출범했다. 문재인 정부 초 화려하게 출범한 4차위는 요즘 ‘과거 대통령 직속 위원회들처럼 정부가 바뀌면 곧 사라질 위원회’로 찍혀 겉돌고 있다. 4차위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해도 관련 부처는 “왜 우리 부처 사업을 가로채나”라며 반발하기 일쑤다. 정책을 밀고 나갈 힘을 받기도 어렵다. 한 정부 관계자는 “4차위는 정권 홍보를 위해 여러 조직을 단순히 합쳐 탄생한 조직”이라며 “정책을 일관성 있게 수행할 만한 실행력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 위원회 수 역대 최대, 작년에만 19개 신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위원회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문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2017년 6월 556개였지만 지난해 말 기준 593개로 집계됐다. 3년 6개월 만에 37개가 늘어난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가 터진 지난해 회의나 행사 등이 위축됐다. 위원회 중 지난해 워크숍, 간담회, 현장방문 등의 행사를 한 곳도 열지 않은 곳은 전체의 89.2%(529곳)였다.
코로나19 위기에도 위원회는 계속 늘었다. 지난해 1년간 새로 19개 위원회가 생겼다. 이 중 ‘자율주행차 시범운행지구위원회’ 등 4곳은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회의가 아예 열리지 않거나 한 차례만 열린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정권마다 위원회 수는 일정 패턴을 보였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위원회 수를 분석한 결과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의 취임 첫해에는 전년보다 평균 63개 늘었다. 하지만 이듬해 36개가 줄었다가 다시 증가세를 보이며 임기 4년 차에 전년보다 27개 늘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임기 초에는 정권의 핵심 정책에 추진력을 모으고, 정권 창출에 공헌한 사람 ‘자리 챙기기’를 하기 때문”이라며 “1년이 지나 중복되는 위원회를 정리하는 단계를 거친 뒤 임기 말이 되면 다시 ‘정권 홍보’나 ‘자리 챙기기’가 반복된다”고 분석했다.
○ 친정부 위원들, 정책 통과 ‘거수기’ 비판
정부가 민간 전문가들을 통해 정책 심의와 조언을 받으려 예산을 들여 설치한 행정기관 위원회가 깜깜이로 운영되고 부처와의 알력 다툼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부 위원회는 친정부 위원들로 구성돼 정부가 정책을 심의할 때 ‘거수기’가 된다는 비판도 있다.
청년정책조정위원회는 지난해 9월 청년 정책의 컨트롤 타워를 맡아 출범했다. 하지만 민간위원 상당수가 ‘친문’ 활동이나 더불어민주당 당직을 맡아 오는 등 친정부 인사들로 구성돼 편향성 논란이 불거졌다. 원자력계 일각에서는 원자력 안전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정부 ‘탈원전’ 정책에 동조해 고의로 원전 운영 허가를 지연한다고 비판한다. 원안위는 완공된 신한울 1호기 원전 운영 허가를 심의하기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12번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아직도 최종 결론을 못 낸 상태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부가 임명한 위원들이 ‘정권 입맛’에 맞게 고의로 심의를 지연하거나 얼렁뚱땅 주요 사안을 뭉개 위원회의 합리적 조정 기능이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라며 “정부도 위원회를 만들어 정책적 책임을 떠넘기는 통로로 악용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위원회 관리를 총괄하는 행정안전부는 매년 ‘식물 위원회’를 방지하기 위해 위원회 정비 계획을 밝히고 있다. 지난해 정비 계획 대상에 오른 위원회는 89개로 이 가운데 ‘운영 활성화’ 대상이 71곳(80%)이다. 하지만 행안부는 소속 부처를 조정하거나 안건을 확대하도록 조정하는 데 머문다. 폐지 대상은 11곳, 통폐합 대상은 7곳에 불과하다. 행안부 관계자는 “행안부가 모든 위원회를 일일이 관리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각 부처의 책임하에 관리돼야 하나 협조를 받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법률에 명시된 대로 회의 내용과 위원 명단 등에 대한 투명한 공개가 의무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박순애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부로서는 위원회를 최대한 만들어 정권 홍보를 하고 자기 사람들을 쓰려는 게 특성”이라며 “불필요한 위원회가 생기지 않게 ‘위원회 총량제’ 등 강제 방안을 도입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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