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시대를 초월한 럭셔리 스포츠카 ‘재규어 E-타입’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25일 03시 00분


E-타입의 최종 생산형에 가까운 1974년형 로드스터. E-타입은 14년 간 7만2000여 대가 생산되었다.  재규어 제공
E-타입의 최종 생산형에 가까운 1974년형 로드스터. E-타입은 14년 간 7만2000여 대가 생산되었다. 재규어 제공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61년 3월 15일. 스위스에서 열린 제네바 오토살롱에서 데뷔한 한 대의 차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재규어가 새로운 스포츠카인 E-타입을 선보인 것이다. 보는 이들은 금세 매료되었고, 재규어는 오토살롱이 끝나기도 전에 500대 주문을 받았다. 이렇게 큰 인기에도 불구하고, 재규어는 이 차가 회사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을 넘어 20세기 후반에 걸쳐 영국 스포츠카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E-타입은 재규어에 의미가 큰 모델이다. 13년 동안 꾸준히 업그레이드 되며 브랜드의 고성능 이미지를 굳힌 XK 시리즈의 역할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탁월한 가속력과 제동력, 세련되면서도 민첩한 핸들링 등 스포츠카가 갖춰야 할 자질들을 이전보다 더 발전된 모습으로 보여줘야 했다. 개발자 윌리엄 헤인즈와 맬컴 세이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양산차’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E-타입을 개발했다.

1961년 E-타입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재규어 총수 윌리엄 라이온스 경. 재규어 제공
1961년 E-타입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재규어 총수 윌리엄 라이온스 경. 재규어 제공
요즘 흔히 접할 수 있는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표현이 1960년대 자동차에 쓰였다면, E-타입이 그 주인공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당시 일반 승용차는 물론 스포츠카에도 많이 쓰이지 않았던 기술을 대거 반영했기 때문이다.

E-타입은 재규어가 프레임 위에 차체를 얹는 고전적 구조를 버리고 현대적인 모노코크(일체형 차체) 구조를 도입한 첫 모델이다. 모노코크 구조는 탑승 공간을 중심으로 차체 뒤쪽에 쓰였고, 엔진이 놓이는 차체 앞부분은 가볍고 견고한 스페이스 프레임(입체형 파이프 구조)으로 만들었다. 차체 앞뒤 무게를 알맞게 배분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그 의도는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완전히 새로 설계한 독립식 뒤 서스펜션도 편안한 승차감과 역동적인 움직임을 함께 뒷받침했다.

E-타입은 데뷔 당시에 직렬 6기통 3.8L 엔진을 얹었다. 이 엔진은 앞서 재규어가 르망 24시간을 비롯해 여러 경주에 내보내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D-타입 등의 경주차에 썼던 적이 있다. 이 엔진에 쓰인 DOHC(흡기와 배기 밸브를 제어하는 캠샤프트가 따로 설치되어 있는 구조) 밸브계는 당시만 해도 재규어 이외에는 극소수의 고성능 차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20세기 후반 재규어를 대표하는 스포츠카 E-타입이 탄생 60주년을 맞았다. 기념으로 특별히 한정 복원한 E-타입 60 컬렉션.
20세기 후반 재규어를 대표하는 스포츠카 E-타입이 탄생 60주년을 맞았다. 기념으로 특별히 한정 복원한 E-타입 60 컬렉션.
269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이 엔진 덕분에, 1.2t이 조금 넘는 무게의 E-타입은 6.9초 만에 시속 97km까지 가속할 수 있었다. 최고속도는 마지막 초기형 XK 시리즈인 XK150과 같은 수준인 시속 150마일(시속 약 241km)에 이르렀다. 당시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승용차 중에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차는 흔치 않았다. 물론 페라리, 애스턴 마틴 등 스포츠카로 이름을 날린 브랜드 차들 중에는 비슷한 성능을 내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E-타입의 가격은 그런 차들의 절반 수준이었다.

스포츠카는 빠른 가속만큼 정확한 제동도 중요하다. 이 때문에 재규어는 E-타입의 네 바퀴에 모두 디스크 브레이크를 달았다. 당시 유명했던 스포츠카들도 모든 바퀴에 디스크 브레이크를 단 차는 드물었다. 특히 뒷바퀴용 브레이크는 차의 운동 특성을 좋게 만들기 위해 바퀴가 아니라 구동축 안쪽에 설치했다. 이른바 인보드 방식 브레이크 배치였다. 이와 같은 브레이크 배치는 이미 이전 모델인 XK150에도 쓰였을 만큼, 재규어는 기술 면에서 선구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E-타입 쿠페의 실내. 질감이 살아있는 목재 스티어링 휠이 눈길을 끈다.
E-타입 쿠페의 실내. 질감이 살아있는 목재 스티어링 휠이 눈길을 끈다.
우아한 모습의 차체는 철저하게 공기역학을 고려한 것이었다. E-타입의 차체를 설계한 맬컴 세이어는 원래 항공기 개발자여서 공기역학의 효과와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스타일리스트가 아닌 공기 역학자(aerodynamicist)로, E-타입을 수학적으로 디자인한 첫 양산차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세이어는 차체를 디자인하면서 수학 방정식을 이용해 곡면을 기하학적으로 계산했다고 전해진다.

E-타입은 두 차례 대대적으로 개선되며 14년 동안 생산된 장수 모델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3.8L였던 직렬 6기통 엔진의 배기량은 1964년에 4.2L로 커졌고, 1971년에는 새로 개발한 V12 5.3L 엔진을 얹었다. 엔진은 점점 커졌는데도 최고출력의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커진 배기량 덕분에 토크가 높아져 가속력과 가속감은 점점 더 좋아졌다. 성능과 편의성, 안전성도 시간이 갈수록 수준이 높아졌다.

그러나 많은 애호가가 최고의 E-타입으로 꼽는 차는 1961년부터 1968년까지 생산된 시리즈 1이다. 맬컴 세이어의 오리지널 디자인이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구현됐기 때문이다. 차체는 2인승 쿠페와 간이형 뒷좌석을 갖춘 2+2 쿠페, 2인승 로드스터(컨버터블) 세 가지였는데, 모두 고전적이고 우아한 분위기를 냈다. 차체 비례가 비슷한 동시대 이탈리아나 프랑스, 독일 스포츠카들과는 사뭇 다른 E-타입만의 분위기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졌다.

옛 차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와이어 휠.
옛 차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와이어 휠.
이는 페라리 창업자인 엔초 페라리가 E-타입을 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차’라는 찬사를 보낸 것으로도 입증된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엔초뿐만은 아니다. 2008년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지는 ‘가장 아름다운 차 100대’를 선정하면서 E-타입을 1위에 올렸고, 1996년부터는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1963년형 E-타입 로드스터가 영구 전시되고 있다. MOMA의 전시물 가운데 자동차는 E-타입을 포함해 아홉 대뿐이다.

데뷔 직후에도 E-타입의 매력은 많은 이를 사로잡았고, 유명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랭크 시나트라, 조지 해리슨을 비롯한 가수들, 피터 셀러스, 토니 커티스 등 배우들, 포뮬러 원(F1) 챔피언을 차지했던 영국 자동차 경주 선수 재키 스튜어트 경 등도 E-타입을 소유했다. 14년간 7만2000여 대가 생산된 E-타입은 이제 많은 사람이 갖고 싶어하는 클래식카의 반열에 올랐다. 클래식카 경매에서도 꾸준히 가치가 올라가고 있다. 미국 몬테레이에서 2018년 RM 소더비 주관으로 열린 경매에서는 1961년형 시리즈 1 쿠페가 72만 달러(약 8억 원)에 낙찰되었고, 지난해에는 재규어가 복원한 1963년형 라이트웨이트 E-타입이 미국 엘커트 컬렉션 경매에서 171만 달러(약 19억 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E-타입은 재규어의 황금기에 가장 화려하게 빛난 모델이면서, 재규어 역사에서 가장 존재감이 큰 모델이기도 하다. 이후 재규어는 E-타입의 혈통을 잇는 정통 스포츠카를 꾸준히 만들었지만 그 어느 것도 E-타입만큼 혁신적이거나 매력적이지 못했다. 럭셔리 카로 봐도 손색없는 클래식카로 자리잡은 E-타입과 달리 지금의 재규어를 럭셔리 브랜드로 취급하기 망설여지는 이유는 E-타입과 같은 걸작을 꾸준히 내놓지 못한 데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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