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까지 내려온 희망퇴직, “인생 2막 기회로”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새 출발” 2, 3년치 급여-지원금 등 받아
IT 등 원하던 분야 재취업하거나, 카페 등 창업… 자격증 도전도
“과장-차장들까지 들뜬 분위기” 5대은행 6개월새 2600명 퇴사
#1. 올해 초 희망퇴직으로 은행을 떠난 A 씨(48)는 현재 한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정보기술(IT)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와 경영 컨설팅을 해주는 곳이다. A 씨는 3년 전부터 희망퇴직을 계획하고 대학원에서 기술투자를 전문적으로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A 씨는 “은행보다 월급도, 회사 규모도 작지만 평소 꿈꾸던 IT 분야에서 일하게 돼 의욕이 샘솟는다”며 “20년 넘게 은행 영업점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데서 벗어난 해방감도 크다”고 했다.
#2. 한 시중은행 차장인 B 씨(44)의 꿈은 희망퇴직이다. 희망퇴직 연령대가 점점 낮아진다는 소식에 기대했지만 올해는 대상에 들지 못했다. B 씨는 “희망퇴직을 하면 일단 퇴직금으로 아파트 대출금을 갚고 나머지 모아둔 돈을 더해 동네에 작은 카페를 열 계획”이라며 “인생 2막만큼은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일을 해보려 한다”고 말했다.
최근 금융권에서 희망퇴직 바람이 거세다. 6개월 새 5대 시중은행에서 희망퇴직으로 은행을 떠난 직원만 2600명이 넘는다. 쫓겨나듯 짐을 싸던 눈물의 희망퇴직은 옛말이 됐다. 오히려 희망퇴직을 더 자주 해달라고 요청하는 은행원이 많아졌다. 일찌감치 ‘인생 2막’을 준비하려는 40, 50대가 늘어난 영향이다. 수억 원의 목돈을 손에 쥘 수 있는 기회도 희망퇴직 외에는 흔치 않다.
○ 1980년대생도 희망퇴직…“눈물 대신 기대”
2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말부터 올해 6월 말까지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에서 희망퇴직으로 은행을 떠난 직원은 총 2628명으로 집계됐다.
특히 신한은행은 올 들어 이례적으로 희망퇴직을 두 차례 실시했다. 1월에 220명이 나간 데 이어 지난달 또 희망퇴직 신청을 받아 133명이 추가로 은행을 떠났다. 희망퇴직 대상과 기회를 확대해 달라는 직원들의 지속적인 요청에 따라 희망퇴직을 한 번 더 실시한 것이다.
예전엔 희망퇴직이 임금피크제에 들어가거나 적용을 앞둔 50대 직원을 위한 제도로 여겨졌지만 최근 30, 40대에게까지 희망퇴직 기회가 확대되고 있다. 국민은행은 희망퇴직 신청 가능 연령을 지난해 1964∼1967년생으로 했지만 올해는 1965∼1973년생으로 넓혔다. 만 48, 49세도 대상이 된 것이다. 신한은행의 희망퇴직 신청 가능 연령도 만 49세부터였다.
KB손해보험은 한발 더 나아가 근속 15년 이상이면서 1983년 이전에 출생한 대리, 주임급까지 포함해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만 38, 39세도 희망퇴직 대상에 오른 것이다. 결국 지난달 말 101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났고 이 가운데 30대는 없었지만 1981년생(만 40세) 직원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은행도 만 40세 이상이면서 15년 이상 근속자를 대상으로 ‘준정년’ 희망퇴직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희망퇴직을 대하는 은행원들의 분위기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시중은행 대리인 손모 씨(34)는 “지점장부터 40대 과장, 차장들까지 희망퇴직 얘기만 나오면 분위기가 들뜬다”며 “희망퇴직 연령에 아슬아슬하게 두세 살 모자란 사람들은 대상에 포함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꿈꾸던 분야에서 일해야”
상대적으로 젊은 직원들의 희망퇴직이 늘면서 퇴직 후 진로도 다양해지고 있다. 은행에서 20년간 부동산 관련 대출 업무 등을 했던 신모 씨(49)는 올해 초 희망퇴직을 한 뒤 공인중개사 개업을 준비하고 있다.
퇴직 전부터 관련 공부를 해왔던 신 씨는 10월 공인중개사 시험에 응시할 예정이다. 퇴직금으로 받은 4억 원가량은 개업할 상가 임차료와 새 차 구입 등에 쓸 계획이다. 신 씨는 “은행에서 대출 업무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새로운 도전을 하게 돼 설렌다”고 했다. 지난해 초 보험사에서 희망퇴직한 김모 씨(50)는 6개월 만에 일반 기업의 재무 관리 담당자로 재취업했다.
2년 전 카드사에서 희망퇴직한 C 씨(49)는 현재 서울 중구에 전시, 공연 등을 하는 복합문화공간을 직접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미술 전공의 이력을 살려 카드사에서도 브랜드 전략과 디자인 업무 등을 했던 C 씨는 문화예술계에서 인생 2막을 열고 싶다는 계획을 일찌감치 세워 준비했다.
은행 지점장으로 희망퇴직한 박모 씨(55)는 서울 근교에서 숲 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박 씨는 “26년을 은행에서 보냈는데 다음 26년은 평소 좋아하던 자연에서 일하고 싶었다”며 “5년 이상을 준비해 숲 해설사가 됐다”고 했다. 그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퇴직해 새 삶을 살고자 하는 후배들의 상담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최근엔 금융권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인터넷전문은행이나 핀테크(금융 기술기업) 등으로 이직하는 은행원도 늘고 있다. 한 인터넷은행 관계자는 “희망퇴직을 앞둔 은행원 중 이직을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인터넷은행도 은행 실무 경험을 가진 관리자급이 필요한 만큼 좋은 인력이 있는지 물색한다”고 했다.
○ 금융사도 인력 구조조정 절실
희망퇴직 규모와 대상 연령이 확대되는 것은 서둘러 인생 2막을 준비하려는 40, 50대 직원들과 디지털 전환에 따라 구조조정이 절실한 금융회사의 수요가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실제로 금융투자협회가 금융·보험업계 재직자 5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8.6%가 “50세 전에 본격적인 퇴직 준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퇴직 후 재취업을 희망한다는 응답자도 73.5%였다.
다른 업종에 비해 금융권의 희망퇴직 조건이 좋은 점도 40, 50대 젊은 퇴직의 요인이 되고 있다. 금융사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24∼36개월 치 급여를 특별퇴직금으로 지급하고 자녀 학자금, 건강검진비, 재취업·창업 지원금 등을 챙겨준다. 퇴직금으로만 수억 원의 목돈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디지털 전환을 위해 영업점을 줄이고 비대면 업무를 확대하려는 금융사들도 희망퇴직을 인적 구성 재편의 기회로 삼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경기가 좋았을 때 대거 채용된 1960, 1970년대생 직원이 많아 차장·부장급의 인력 적체가 심하다”며 “금융사는 희망퇴직을 통해 적체된 인력을 순환시키고 현재 필요한 디지털·IT 인력을 보충할 수 있다”고 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금융사들이 2017, 2018년에도 대규모 희망퇴직을 진행해 인력 구조를 개선시켰다”며 “빅테크, 핀테크 등의 부상으로 기존 금융회사의 디지털 전환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 희망퇴직 규모나 대상은 더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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