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 인터뷰①
한창 일할 나이 30대에 사업실패로 2번이나 자살 시도
여름엔 아이스께끼 겨울엔 찹쌀떡, 구두 통 짊어지고 서울 골목길 누벼
화장실 청소로 시작해 직원 3만8000명 매출 1조6000억원 삼구그룹 일구다
청소와 경비 등 아웃소싱에서 종합서비스 회사로 고속 성장한 삼구아이앤씨의 구자관 책임대표사원(CEO)은 결혼 주례를 절대 서지 않는다. 3만8000여명의 직원을 두고 계열사 27개, 매출액만 1조6000억 원이나 되는 중견그룹을 이끄는 일흔여덟 고령의 최고경영자(CEO). 그가 직원들 주례마저 한사코 마다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닌 ‘화(禍)’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까봐 두려워서다. 5000만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유독 그에게만 미친 재앙이 너무나도 많았다. 평생에 어떻게 이런 불행한 일이, 그것도 몇 번씩이나 그에게 닥쳤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머피의 법칙’도 이렇게 무지막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 책임사원의 인생 역정(歷程)은 참으로 기구했다. 평생을 살면서 누구는 한번도 겪지 않았을 일을 그에게는 수시로 찾아왔다. 유난히 혹독했던 삶의 흔적은 지금도 깊게 패여 있었다. 지난 15일과 19일 두 차례 서울 을지로 본사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왁스 개발하려다 공장 전소, 불구덩이에 휩싸여
1944년생인 구 회장은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에 2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한번은 공장에 불이 나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청소세제인 왁스를 공장에서 만드는 과정에서 전신(全身)에 불이 붙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청소에 필요한 국산 왁스 개발을 눈앞에 두고 솔벤트를 붓다가 그만 폭발해버렸다. 비 오는 흐린 날 저기압 상태에서 화공 약품을 다루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공장은 전소됐다. 그도 한순간에 불구덩이에 휩싸였다.
깨어보니 서울 을지로 백병원이었다. 화상이 심해 몸이 엉겨 붙을 정도였다. 고통이 너무 커 오히려 죽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의사는 화상 치료를 위해 사흘에 한번씩 그를 탕에 넣고 수세미로 온 몸을 벗겼다. 살이 달라붙어 있으면 썩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치료를 해야만 했다. 전신 마취를 사흘에 한번씩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치 마루타가 된 듯한 자신이 처량하기도 했지만 살을 도려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은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다.
“백병원 12층 드레싱 룸에서 하도 아파 고함을 치면 1층 현관에까지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살아날 수 있을지 확답을 못했어요. 그게 더욱 절망적이었죠. 차라리 죽자고 생각했지요.”
몇 번 치료를 받다가 회복돼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는 좌절감에 12층 병원 독방에서 엉금엉금 기어가 창문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안에서 열수 없었고, 자신의 양손과 발을 담구고 있던 커다란 약통만 엎지른 채 미수에 그쳤다. 죽는 것도 쉽지 않았다. 손상되지 않은 자신의 피부를 포를 뜨듯 떼어내 화상 부위에 붙이는 이식 수술을 수차례 한 뒤 피부가 95%나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1년은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았던 병원 생활은 다행히 한달 보름 만에 끝냈다. 그러나 병원비 500만원은 고스란히 빚이었다. 서울의 집 한 채가 2500만원 할 때였다.
●처자식 먹여 살릴 보험금 타려 한강에 뛰어들어
퇴원 후 다시 찾은 12평짜리 사무실엔 책걸상이 모두 뒤집어져 있었다.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가장이 경제력을 잃자 대신 부인이 생업 전선에 나섰다. 평화시장의 ‘땡 처리’ 옷을 사 시장 앞에서 노점을 폈다. 먹고 살아야했기에 병든 남편 대신 나선 것이다. 구자관은 전봇대 뒤에 숨어 지팡이에 의지한 채 물끄러미 부인이 장사하는 모습을 몰래 보고 눈물을 훔쳤다. 그 때 노점상단속반이 들이닥쳤다. 주섬주섬 팔던 옷을 챙겨 보따리에 넣어 골목길로 도망치는 부인의 뒷모습을 보곤 억장이 무너졌다. 당시 빚이 8000만원이나 됐다. 재기하기엔 턱없이 많은 빚이었다.
단속반을 피해 허겁지겁 도망치는 부인을 보면서 그는 결심했다. 생명보험을 들어 나 하나 죽고 가족을 살리기로. 당시 생명보험 한도가 1억2500만원이었다. 빚 갚는데 8000만원, 평화시장 2평짜리 가게권리금 2000만원, 아파트 한 채 2500만원. 이 보험금이면 부인이 아이 둘 가르치면서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먼저 보험영업을 하는 친구에게 보험에 가입한 뒤 자살할 날짜를 잡고 유서를 썼다. 부인에겐 내색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집 사람은 ‘오늘 이만큼이나 벌었다’면서 ‘이 정도면 우리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고 가게도 하나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자랑했습니다. 남편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었어요.”
서울 장충동 소줏집에서 대낮부터 술을 퍼마셨다. 멀쩡한 정신으론 자살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빨간 색 포니 픽업을 몰고 반포대교로 향했다. 남산 2호 터널을 빠져나와 한강으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난간을 들이받고 말았다. 술기운 때문에 과녁을 조준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고, 이마에선 피가 주르르 흘러 내렸다. 몸이라도 빠져나와 한강에 빠지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살이 되기 때문에 보험금을 탈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멍하니 있었다. 지나던 택시 운전사가 경찰에 신고했고, 이어 경찰 백차가 출동해 그를 방배동 집으로 데려다줬다. 보험금을 타겠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경찰차를 타고 집에 온 구자관은 아내에게 교통사고가 났다며 집에 있던 돌 반지 2개를 받아 경찰에게 건네려 했다. 감사의 표시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경찰은 버럭 화를 내면서 “당신 자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집에까지 데려다준 것이야”라며 호통을 치고 반지를 받지 않았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1년 뒤인 마흔 살 때 일이었다.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앉자 가계를 꾸리기 어려운 가장이 선택한 것은 죽음의 길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양은 버킷에 하이타이와 걸레 들고 변기 청소
청년 구자관은 삶을 너무도 성실하게 산 사람이었다. 가정 형편이 극심하게 어려웠지만 한번도 부모를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걸레 만드는 공장 일도, 아이스께끼 장사도, 찹쌀떡 장사도 나에게 주어진 일이려니 하면서 재미를 붙이면서 즐겁게 일했다.
그가 화장실 청소에 눈을 돌린 것은 박정희 정부 시절 고도의 경제성장 정책으로 서울에 조그만 빌딩이 하나 둘 올라갈 즈음이었다. 서울 서소문에 ‘화이트칼라’라는 사무직이 생길 때 구자관은 아내와 함께 양은 버킷에 하이타이 한 봉지, 걸레 하나, 염산 한통을 들고 음식점의 냄새나는 누런 변기를 닦았다. 당시 음식점 화장실의 위생 상태는 불량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화장실을 가도 변기엔 누런 테가 있었다. 화장실은 암모니아 냄새로 지독하고 철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도 변기는 깨끗해지지 않았다. 야간 고교에서 배운 알칼리와 산의 관계를 응용해 누런 변기를 하얗게 청소했다.
그의 청소는 음식점에서 인기가 높았다. 식당 주인은 청소를 하지 않고 음식만 잘 만들면 됐기 때문이다. 구자관은 청소용구를 들고 전철을 타며 서울의 여기 저기 음식점을 옮겨 다니면서 화장실을 청소했다. 식당 주인들은 외상없이 현금으로 결제해줬다. 나중엔 빌딩 사무실 화장실도 맡았다. 화장실 청소대행이 그의 첫 사업이었다. 구자관이 군대를 제대한 후 한 화장실 청소업은 당시로선 누구도 선뜻 생각할 수 없는 사업 아이템이었다. 그는 회사의 창립기념일을 모른다. 서울 을지로 그의 집무실 앞 벽에는 민들레 꽃 모양과 함께 ‘손이 시렵지 않았고/ 발이 시렵지 않았던/ 어느 봄의 날이었다’고 적혀 있다.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 정확한 날짜를 기억할 수 없기에 삼구이이앤씨의 창립기념일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어느 봄의 날’이라는 이 단어엔 구자관의 역경과 희망의 뜻이 혼재돼 있는 듯 했다. ‘손발이 시렵지 않은’이라는 말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한마디로 응축한 표현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공돌이’ 인생
구자관은 초등학교를 4등으로 졸업했지만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없었다. 밀린 월사금을 졸업할 때까지 내지 못하자 학교에서 졸업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아버지는 잇따른 사업 실패로 행상으로 입에 풀칠을 할 정도로 가세(家勢)는 기울대로 기울었다. 아버지는 7남매 중 큰 형만 대학에 보냈다. 장손만 밀어주면 가족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관념이 팽배한 농경사회 때 삶의 방식이었다. 막내 누나는 초등학교 졸업 후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당구장에서 공을 닦는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악착같이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구자관은 초등학교를 마친 후 바로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중학교는 언감생심이었다. 여름엔 아이스께끼 통을 들고, 가을엔 구두닦이를 했다. 겨울엔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차가운 서울 골목길을 누볐다. 봄엔 소쿠리 등을 파는 방물장사를 했고 아침마다 신문배달도 했다. 빚더미에 앉은 아버지는 행상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엄마 치마에서 응석을 부려야 할 나이에 구자관은 밥벌이를 하러 다녀야 했다. 사촌들은 중학생이었지만 그는 아이스께끼 통을 짊어지고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돈을 벌었다.
그 당시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서독광부 아시죠? 대학을 나오고 쌀 한가마는 거뜬하게 들어 올려야 갈 수 있었습니다. 서독에 광부를 가려 해도 시험을 봐야 했어요. 취업이라고요? 일자리가 없었어요. 구두 통 잘못 짊어 메고 명동에 갔다간 깡패들한테 얻어터지기 일쑤였죠. 공장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구자관은 걸레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공장에 도착하면 아침 6시. 그때부터 하루 종일 일했다. 뿌연 먼지가 사방에 있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는 노래를 하면서 즐겁게 일과 마주했다. 열일곱, 열여덟 나이에 흠뻑 마신 먼지를 생각하면 폐가 망가졌어야 할 텐데 78살 나이에도 아직 멀쩡하단다. 한번도 누구를 원망한 적이 없고 저주한 적도 없었다.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즐겁게 일하려고 했다.
●공장에서 야간 학교로… 배움에 대한 뜨거운 열망
공장에 취직한 10대 소년 구자관. 그의 어머니는 매일 새벽 4시면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아들을 깨웠다. 동이 트면 공장에 가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구 회장의 모친은 작고하시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공장에 보내려고 깜깜한 새벽 4시에 잠에 곯아떨어진 어린 너를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공장 일 보내느라 너를 깨울 때가 가장 힘들었다. 죽으면 내 오장육부를 다 꺼내 깨끗한 물로 헹궈 다시 넣어서 묻어달라”
구 회장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얼마나 힘들고 속이 상했으면 그랬을까. 구 회장은 지금도 모친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소년 구자관이 새벽부터 공장에 나간 이유는 오후 4시만 되면 공장 일을 끝내고 야간 학교를 가야했기 때문이다. 중학교를 다니지 못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배움터는 당시 야간 고등학교였다. 학교에서 사고를 쳐 퇴학이나 제적당한 아이들, 또래보다 5살이나 많은 학업 기회를 놓친 학생도 있었다. 공장을 못 가면 밥벌이를 할 수 없고, 야간 학교에도 갈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공장은 밥줄이자 한 가닥 희망의 끈이었다. 공장 주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겨우 공장을 빠져 나와 학교를 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밤 10시 반 수업이 끝나면 화장실 청소는 반에서 가장 키가 작고 힘이 없는 구자관의 몫이었다. 그 때부터 구자관의 첫 사업인 화장실 청소와 인연을 맺은 것이다. 변기 청소를 끝내고 하교하다가 통행금지 시간을 어겨 경찰서에 잡혀가는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이런 어려움에도 그를 붙든 건 배움에 대한 강한 열망이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아버지는 행상 일을 나갔지만 공부를 하겠다는 구자관의 의지는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만약 그 때 공부를 못했으면 저는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무학(無學)으로 평생을 살았을 겁니다. 배가 고프면 잠시 참으면 되지만 배워야 할 때 배우지 못하면 영원히 기회가 없지요. 이를 악물고 되뇌었습니다. 배고픈 굶주림은 잠시의 굶주림이지만 배움의 굶주림은 영원한 굶주림이라고.”
오후 4시 책가방을 둘러매고 공장을 나서는 구자관에게 공장 주인은 뒤통수에 대고 고함을 쳤다.
“야 이 새끼야. 넌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내일부터 공장에 나오지 마!”
아침 6시에 출근한 사실은 까먹고 일찍 퇴근하는 자관에게 공장 주인은 매몰차게 해고를 통보했다. 야박한 주인의 고함을 뒤로 하고 구자관은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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