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 진출을 선언한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이 본격적인 ‘판 흔들기’에 나섰다.
27일 인텔은 온라인 기술전략 설명회 ‘인텔 엑셀러레이트’를 열고 초미세공정 반도체 개발 로드맵 및 차세대 반도체 장비 도입 계획 등을 밝혔다.
인텔은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TSMC, 삼성전자를 비롯해 다른 파운드리 업체들이 공정기술 개선 속도를 나타내기 위해 통용해온 nm(나노미터, 10억분의 1m)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인텔만의 고유한 표시방법을 쓰겠다고 밝혔다. 또 TSMC, 삼성전자의 주요 고객사인 퀄컴, 아마존을 새 고객사로 유치했다고 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파운드리 사업 후발주자로서 TSMC, 삼성전자와 비교해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업계의 고정관념을 깨고, 공격적으로 고객사 유치에 나서며 인텔만의 ‘새 판 짜기’에 나서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 “2025년까지 2나노 공정 기술 개발 목표”
펫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기술설명회에서 “2025년까지 공정 성능 리더십으로 가는 확실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 혁신 로드맵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주기율표의 모든 원소가 고갈될 때까지 인텔은 무어의 법칙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텔의 공동창업자 고든 무어의 이름을 딴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성능이 2년 마다 두 배로 개선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인텔이 무어의 계승을 꺼내들고 나온 것은 후발주자인 파운드리 시장 내에서 서둘러 기술 선도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날 인텔은 올해부터 추진할 반도체 제조 기술 개발 계획을 상세하게 공개했다. 2025년까지 인텔7, 인텔4, 인텔3, 인텔 20A, 인텔 18A 등 공정기술 혁신 제품을 순차적으로 양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장 현재 양산 중인 10nm 제품 대비 성능이 10~15% 개선된 업그레이드 버전인 인텔7은 내년 초 양산에 돌입한다. 이후 2022년 하반기(7~12월) 양산을 목표로 추진 중인 인텔4부터 인텔 파운드리 제품 중 처음으로 극자외선 노광장비(EUV) 공정 기술을 활용한다고 밝혀다.
네덜란드 ASML이 생산하는 EUV 노광장비는 실리콘 웨이퍼에 5nm(나노미터) 이하의 미세한 반도체 회로를 새겨 넣는 핵심 생산 장비다. ASML은 한 해 약 50대 정도의 EUV 장비를 생산하고 있는데 반도체 업계에서는 ‘5:3:2’ 비율로 TSMC, 삼성전자, 기타 업체가 EUV 장비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인텔 반도체 제조 공정에는 아직 EUV 장비가 활용되지 않고 있다.
인텔은 2024년부터 0.1나노미터(nm)에 해당하는 ‘옹스트롬’ 단위의 인텔 20A, 18A 제품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이 제품을 nm 단위로 환산하면 2nm, 1.8nm다.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 기술혁신을 이끄는 TSMC, 삼성전자가 아직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 없는 최첨단 공정이다. 성공한다면 파운드리 업계 최초가 될 전망이다.
인텔은 이날 발표 상당 시간을 기술 혁신에 대해 설명하는 데 쏟았다. ASML과 협업해 ‘차세대 EUV 장비 최초 도입’을 공언하기도 했다. 인텔 측은 “ASML의 차세대 EUV 장비인 ‘High NA(High Numerical Aperture) EUV’를 가장 먼저 도입해 공정에 배치할 계획”이라며 “이를 위해 ASML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삼성전자, TSMC에 밀리지 않겠다는 도전적 선언”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날 인텔의 발표를 두고 ‘도전적 선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대만 TSMC, 한국 삼성전자로 양분된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명확한 후발주자인데다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고객사 및 업계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대외적 발표였다는 뜻이다.
실제 인텔은 이날 “아마존, 퀄컴을 파운드리 사업의 고객사로 유치했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공급 제품이나 계획을 밝히지 않았지만 퀄컴 측에는 2024~2025년 양산 목표인 20A 제품을, 아마존 측에는 첨단 패키징 기술을 공급하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텔 측은 이날 “파운드리 시장에서 구체적 제품 사양 및 공급 계획을 밝히는 경우는 없다”고 밝혔다.
올 3월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은 100여개 기업과 파운드리 계약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진 상태다. 퀄컴과 아마존과 같은 ‘빅테크’ 기업이 인텔 파운드리 사업의 고객사로 발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업체) 대표 기업인 퀄컴은 삼성전자, TSMC의 대형 고객사이기도 하다”라며 “향후 미국 기업이 자국 기업의 파운드리 제품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 삼성전자의 공급물량을 빼앗기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기대와 우려 뒤섞인 시선
이날 반도체 업계에서는 인텔의 발표를 두고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함께 나왔다. 불과 4개월 전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선언한 인텔이 2025년까지의 기술혁신 로드맵을 발표하고, 퀄컴·아마존 고객사를 유치했다는 점은 분명 긍정적이지만, 과연 인텔이 4년 만에 2nm 제품 개발까지 성공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이 교차했다.
실제 이날 인텔 측은 간담회 직후 질의응답에서 “10nm 제품을 양산 중인 인텔이 불과 4년 만에 2nm 제품 개발까지 혁신을 이뤄내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질문에 “2024년 말이 파운드리 최점단 공정 기술 경쟁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판단한다. 과거 경험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고, 예정대로 기술 혁신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인텔의 발표가 인상적이지만 관련 약속이 예정대로 이뤄질까 우려의 시선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기술 개발 가속화 일정이고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우리의 오늘 선언적 발표가 아니다. 이미 기술 검증이 완료됐고, 면밀한 검증을 거쳐 발표한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텔은 막대한 자금력을 비롯해 미 정부의 적극적 지원, 미국 테크 공룡들의 지원사격이라는 3박자를 갖추고 올해 초 파운드리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양산 기술력이 TSMC와 삼성에 뒤처져 있고 파운드리 성공 경험이 없는 것이 문제로 지적됐다. 이날 인텔의 발표는 이 같은 시장의 우려에 대한 답변인 셈이다.
앞서 15일(현지 시간) 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은 인텔이 글로벌 3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글로벌파운드리’ 인수를 추진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대만 UMC와 함께 시장점유율(7%) 3위를 달리고 있는 글로벌파운드리는 100여 곳의 고객사를 보유하고 있고 12nm(나노미터) 시장에서는 안정적 사업 환경을 갖추고 있다. 딜이 성공한다면 인텔은 초미세 공정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는 환경을 갖추게 된다.
인텔의 공격적인 행보가 특히 세계 1위 TSMC를 추격하기 바쁜 삼성전자에 있어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인텔의 부상이 적잖은 부담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171조 원을 투자해 시스템반도체 1위 탈환을 목표로 내걸고 뛰고 있지만 1위 TSMC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공급망 확대 정책과 파운드리 수요 급증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에 170억 달러(약 20조 원)를 들여 파운드리 신규 공장 건설 계획을 밝혔고, 최종 부지 선정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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