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코로나로 빛바랜 도쿄 올림픽 신기술
아베 자랑하던 자율차 ‘e-팔레트’
초고화질 방송-수소기술엔 주목
올림픽은 스포츠 축제를 넘어 개최국의 최첨단 과학 기술을 뽐내는 무대이기도 하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에서는 밤하늘을 수놓은 1218대의 오륜기 드론쇼, 고화질 가상현실(VR) 중계, 5세대(5G) 기술 등으로 ‘역사상 가장 기술적으로 발전한 올림픽’이란 찬사를 받았다.
일본도 같은 꿈을 꿨다. 2013년 9월 도쿄가 이스탄불, 마드리드 등 경쟁 도시를 제치고 두 번째 여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을 때 일본 정부는 자국을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국가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도요타, 파나소닉 등 2020 도쿄 올림픽을 ‘신기술 시연장’으로 본 일본 대기업들은 2015, 2016년부터 수조 원 규모의 연구개발(R&D) 비용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기대만큼의 흥행은 거두지 못하고 있다.
○ 코로나19로 일그러진 ‘신기술 쇼케이스’
가장 큰 기대를 모은 건 자율주행차였다. 올림픽 유치를 이끈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는 2015년 과학기술 포럼 등에서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자율주행차가 운행되니 꼭 보러 오라”고 호언장담했다. 세계 최초의 시속 200km가 넘는 고속열차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1964년 도쿄 올림픽의 신칸센처럼 일본은 자율주행을 기술 강국의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상징으로 여겼다.
도요타는 2019년 도쿄 모터쇼에서 자율주행 기능을 갖춘 차세대 다목적 차량 ‘e-팔레트’를 선보였다. 한 해 전인 ‘CES 2018’에서 선보인 콘셉트 카를 도쿄 올림픽에 맞춰 개발한 것이다. 일본 자율주행 로봇 업체 ZMP와 택시회사인 히노마루코쓰는 2018년 7월 한 달간 1500명의 유료 승객을 대상으로 자율주행 승합택시 실험을 해 사고 없이 마무리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김이 샜다. 글로벌 전염병 확산으로 대회 일정이 1년 연기된 데 이어 사상 초유의 무관중 올림픽이 되면서 현장에서 직접 신기술을 체험, 평가해 줄 관람객 홍보단의 규모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수영 등 일부 경기장에서는 관중들이 증강현실(AR) 안경을 쓰고 경기를 더 실감나게 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었지만 무관중 탓에 계획이 무산됐다.
대회 개막 100일 전부터 경기장 주변에 기업 전용 전시관을 열어 기술 홍보의 장으로 삼았던 2018 평창 겨울올림픽과 대조적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급증하는 분위기 속에 “여러 국가로부터 관람객을 초대해 세기의 축제를 연다는 발상을 버려야 한다”는 얘기가 진즉부터 나왔다. 코로나19의 급격한 재확산으로 일본 정부가 30일 가나가와 등 수도권 3개 현 등에 긴급사태 발효를 결정한 상황에서 올림픽 신기술에 대한 보도는 외신은 물론이고 일본 내에서도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기술 알리기에 앞장서야 할 기업들은 부정여론을 의식해 오히려 홍보를 자제하고 있다. 올림픽 최상위 후원사로 자율주행, 로봇 등 신기술을 잔뜩 준비했던 도요타는 사전에 제작해 놓은 올림픽 관련 이미지 광고도 내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체 뉴스 채널인 도요타타임스도 1년 전 성화 봉송 주자 및 후원 선수 기사를 냈던 것과 다르게 개막 후 관련 뉴스가 뜸하다. 도요다 아키오 사장 등 임원진도 개막식에 불참했다.
공개된 기술이 기대 이하라는 평가도 나온다. 도요타는 약속대로 시속 20km, 레벨4 자율주행 능력을 갖춘 e-팔레트 16대를 도쿄 올림픽 선수촌의 셔틀버스로 투입했다. 하지만 올림픽 기간 도심과 고속도로 자율주행을 선보이겠다는 당초 계획에는 한참 못 미치는 모습이다. 선수촌 안의 짧고 단조로운 코스를 오가는 수준의 기술력은 3년 전 평창 올림픽에서 현대자동차, KT 등 국내 기업들이 도로에서 선보인 자율주행 기술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이다.
도요타는 원래 올림픽 때마다 문제였던 교통 체증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적절한 배차를 돕는 AMMS와 영상을 통한 차량 관리를 제공하는 e-TAP를 개발했다. 하지만 관람객이 없는 황량한 도로 사정에선 무용지물이 됐다.
일본 정부가 차세대 먹거리로 지목한 로봇 역시 준비한 것에 비하면 흥행이 저조하다. 2019년부터 ‘도쿄2020 로봇 프로젝트’를 가동한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와 기업들은 올림픽에서 대대적인 로봇 홍보에 나설 계획이었다. 미국 대 프랑스 농구경기 하프타임에 등장해 자유투와 3점슛을 넣은 7피트짜리 안드로이드 로봇(CUE3), 경기장에 럭비공을 전달하거나 선수가 던진 투창을 회수하는 데 쓰이는 필드지원 로봇(FSR) 등이 모습을 드러내며 관심을 받았지만 게임 체인저급의 기술은 아니었다. 공항, 숙소, 경기장의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파나소닉의 웨어러블 로봇 ‘파워 어시스트 슈트’ 역시 이미 물류, 제조 현장에서 유사한 로봇이 많이 활용되고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AI) 기술을 통해 외국인 관람객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돕겠다는 실시간 통역 기술도 빛이 바랬다. 도쿄 나리타공항에 외국인 안내 로봇 5대가 배치됐지만 AI가 아닌 자원봉사자가 로봇을 조종하고 응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철도회사 JR동일본이 레슬링, 태권도, 펜싱 등의 경기가 열리는 지바현 인근 가이힌마쿠하리역에 무인 역무원 ‘AI 사쿠라’를 선보였지만 일본어 영어 한국어 중국어로 철도 정보, 역 구내 정보, 환승 정보, 관광 정보 등을 안내해 주는 수준이다.
일본이 확산시키고자 했던 ‘로봇의 사회적 이용’은 오히려 올림픽 이후 열리는 패럴림픽에서 주목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도요타가 개발한 ‘휴먼 서포트 로봇(HSR)’과 ‘딜리버리 서포트 로봇(DSR)’은 각각 휠체어 이용자의 자리를 안내하거나 간식이나 물건을 배달해주는 등 지원 역할을 맡게 된다.
○ 로봇-자율주행 대신 8K-수소 주목
올림픽은 첨단 방송 중계 기술의 경연장이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도쿄 올림픽에서 8K급 초고화질 본방송에 나섰다. 8K는 가로 7680개, 세로 4320개의 픽셀(화소)이 있는 해상도다. ‘UHD’로 불리며 상용화된 4K보다 화면을 구성하는 픽셀 수가 4배 더 많다.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 몸에서 흩날리는 땀방울은 물론 관객석에 앉은 대회 관계자들의 표정을 사람마다 비교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삼성전자, LG전자가 8K TV를 시판 중이지만, 국내에는 8K 방송채널이 아직 없어 일본에서만 8K 중계를 볼 수 있다.
일본 통신사 NTT도코모는 요트 경기 중계에서 5G에 ‘키라리’라는 몰입형 라이브 기술을 접목시켜 4K 영상 3개를 이어붙인 12K 해상도의 라이브 영상을 준비했다. 가나가와현 에노시마 요트 항구에 설치된 55m 길이의 초대형 스크린을 통해 망원경 없이도 바로 앞 유람선 VIP석에서 보는 것처럼 몰입감을 지원한다.
이번 올림픽은 ‘수소 올림픽’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수소 기술을 앞세웠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프로판가스 대신 친환경 에너지인 수소로 성화대를 밝혔고 올림픽 선수촌에는 후쿠시마현에서 태양광 등 재생 가능 에너지로 만든 수소를 이용해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도요타는 올림픽 기간 수소차 ‘미라이’ 500대를 지원했고, 도쿄도는 도요타로부터 수소전기(FCEV) 버스 ‘소라’ 100대를 조달해 운영하고 있다. 도쿄 주변에는 35개의 수소 연료 충전소가 새로 마련됐다.
선수들이 받는 메달도 재활용됐다. 올림픽조직위는 2017∼2019년 2년간 일본 전역에서 ‘모든 사람의 메달’ 캠페인을 열어 620만여 대의 중고 휴대전화와 7만9000t의 소형 가전제품을 수거했다. 여기서 금 33kg, 은 3500kg, 동 2200kg을 추출해 총 5000개의 메달을 제작했다. 재활용 메달은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도 자동차 부품과 거울 표면에서 나온 재료를 이용해 선보인 바 있다.
전국 백화점과 학교에서 수거한 플라스틱 폐기물 24.5t과 3차원(3D) 프린터를 이용해 98개의 메달 시상대가 제조됐다. 연단 앞에 장식된 오륜기 링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난민들을 위한 임시주택에 쓰였던 재활용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다. 대회가 끝나면 연단에 쓰인 플라스틱은 샴푸와 세제 병으로 다시 재활용될 계획이다.
올림픽은 신기술 경연장… 1948년 가정 TV중계, 1996년 인터넷 활용, 2000년 가상현실 도입
1988년 서울, 디지털 타임키핑… 1000분의 1초까지 정밀 측정
올림픽에선 당대 기술의 혁신을 앞서 체험할 수 있다. 정보기술(IT), 중계방송, 시간 측정 등 기술의 발전은 올림픽을 보는 즐거움을 높였고 올림픽이 끝난 뒤엔 다른 경기나 산업으로 퍼져 갔다.
가정에서 TV로 시청하는 ‘집관(집에서 관람)’은 1948년 런던 올림픽부터 가능했다. TV 중계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처음이지만 당시엔 베를린 곳곳의 ‘텔레비전 홀’에 설치된 25개 스크린이나 올림픽 선수촌에 설치된 수신기로만 볼 수 있었다. 영국 BBC는 런던 올림픽 중계권을 3000달러에 구입해 경기를 중계했다. 미디어 올림픽의 시작이었다.
아시아 첫 올림픽인 1964년 도쿄 올림픽은 “공상과학(SF) 소설 대회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림픽에 맞춰 신칸센을 개통했고 최초의 위성방송과 100분의 1초 단위의 정밀 측정 시스템을 선보였다.
일본 정부는 미 항공우주국(NASA)과 협력해 원래 전화 사용을 위해 설계된 통신 위성으로 TV 신호를 전송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전 세계 3분의 1 지역의 시청자들이 대회를 실시간 시청할 수 있게 됐다. 개막식과 레슬링, 배구, 체조 등 일부 경기가 처음으로 컬러로 중계됐다. 올림픽 공식 타임키퍼였던 세이코는 통계 기록에 컴퓨터를 이용, 선수 기록을 처음으로 TV 스크린에 표시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컴퓨터화된 타임키핑이 적용된 첫 올림픽이었다. 중요 통계를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하는 것은 물론, 시간 측정 정밀도가 1000분의 1초까지 높아져 정확한 기록을 잴 수 있었다. 지금은 100만분의 1초 단위로 우열을 가려내는 게 가능하다.
자동 측정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오메가가 올림픽 크로노그래프를 공개하면서 도입됐다. 올림픽 처음으로 단일 제조업체가 고정밀 인증을 거친 동일한 스톱워치를 제공해 기록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것이다.
국내 통신 역사에도 서울 올림픽은 큰 획을 그었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텔레콤)가 올림픽을 2개월 앞두고 국내 최초로 휴대전화 서비스를 시작하며 1세대(1G)로 불리는 아날로그 통신이 상용화됐다. 삼성전자는 올림픽에 맞춰 최초의 자체 개발 휴대전화인 ‘SH-100’을 선보였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 인터넷이 본격 활용된 대회였다. 1994년 10월 최초의 웹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가 출시되자 IBM은 올림픽조직위원회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설득해 첫 올림픽 공식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1995년부터 운영된 사이트는 1996년 대회 개막이 다가오면서 올림픽 관련 콘텐츠로 도배됐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마다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팬메일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인터넷으로 각 경기장 컴퓨터를 연결한 ‘인포96’을 통해 경기장에 나가지 않고도 메달 집계 상황과 현장 분위기 등을 파악해 전 세계로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중계방송에 처음으로 가상기술이 도입됐다. 수영 레인별로 출전선수 국기를 가상으로 비춰주는 등 시각적 효과가 극대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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