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폐암 진단 이어 암 치료 돕는 AI 상용화 앞둬
30개국, 300여개 의료기관에서 암 진단 보조에 활용
전문의만 11명, 고차원 의료 데이터로 AI 수준 높여
누적 투자금 1000억 원, 기업 가치 매년 두 배로
“목표는 인공지능(AI)을 통한 암 정복입니다.”
회사 설립한 지 8년, 임직원 수 214명, 지난해 매출액 14억 원인 스타트업 대표의 자신감 치고는 포부가 너무 큰 듯했다. 게다가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도, 신약을 만드는 제약사도 아니다. 대표는 암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공동창업자 6명은 메스를 한번도 잡아본 적 없는 KAIST 동문들이다.
그런데 기업에 대한 기대치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선정한 ‘테크놀로지 파이오니어(기술선도 기업) 100곳’에 선정됐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CB인사이트의 ‘세계 100대 인공지능 기업’(2017년), ‘디지털 헬스 기업 150’(2019, 2020년)에도 빠지지 않는다. 한국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뽑혔다. AI를 통한 암 진단과 치료 분야에서 게임 체인저로 기대를 모으는 스타트업 ‘루닛’ 얘기다.
AI는 암 정복 과정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보다 궁금한 건 그 목표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다. 16일 서범석 대표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 면역항암제 효과 예측하는 AI
최근 서 대표는 300억 원짜리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 암 액체생검(혈액의 DNA에서 암세포 조각을 찾아 암 특성을 분석하는 검사) 분야 세계 1위인 가던트헬스와 파트너 계약을 맺고 300억 원 투자를 유치한 것이다. 미국의 혈액종양내과 전문의 중 80%가 가던트 제품을 쓴다. 기업가치 13조 원인 가던트는 2011년 설립 이래 첫 투자처로 루닛을 선택했다.
가던트가 주목한 건 AI로 암 조직의 면역세포를 분석하는 ‘루닛 스코프’다. 암 조직 슬라이드에서 면역세포의 밀도와 위치를 분석해 특성에 따라 면역항암제의 치료 효과를 예측하는 AI 플랫폼이다. 암 세포 38만 개의 PD-L1(암세포 표면이나 조혈세포에 있는 단백질) 발현 결과를 학습했다.
면역항암제는 직접 암 세포를 죽이지 않는다. 면역 세포를 활성화시켜 암 세포를 공격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아무리 비싸고 좋은 면역항암제라도 환자 몸에 면역세포가 부족하면 힘을 못 쓴다. 루닛 스코프는 환자의 면역학적 형질을 활성 제외 결핍이라는 3가지로 분류해 해당 암 환자에게 면역항암제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예측한다. 일반 검사와 함께 하면 정확도(양성예측도)가 88%까지 올라간다.
이 기술은 미국의 두 기업(Path AI, Paige)과 루닛이 주도하고 있다. 기술력 측면에선 루닛이 앞선다. 루닛 스코프는 올 하반기 연구용으로 선보이고 2, 3년 뒤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서 대표는 “암 조직을 아무리 크게 확대해도 육안으로 분석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면역세포가 어느 정도 있어야 면역항암제에 반응하는지 알아내기도 힘들다”며 “루닛 스코프를 통해 전문의가 판단했을 때보다 면역항암제 투여 가능 환자를 50% 더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 의사보다 암 진단 정확한 루닛 인사이트
세계 시장에 루닛의 이름을 알린 건 AI 영상진단 분야다. 폐암, 폐렴 등 폐질환을 진단하는 ‘루닛 인사이트 CXR’, 유방암을 진단하는 ‘루닛 인사이트 MMG’다. 병변(病變)이나 종양이 의심되는 곳을 화면에 표시하고 양성 확률까지 분석해낸다.
기술력으로는 굴지의 테크기업에도 밀리지 않는다. 2016년 의료영상처리학회 주최 이미지 인식 경연대회(TPAC)에서 구글과 IBM을 꺾고 1위에 올랐다. 지난해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연구소가 발표한 논문에서 루닛의 유방암 진단 정확도는 81.9%로 의사(77.4%)보다 높았다. 루닛 AI와 의사가 협업하면 정확도는 88.6%까지 올랐다. 암 검진자 8805명, 11만 여 개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다.
진단이 정확하다는 건 죽을 뻔한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다. 암 검진을 꾸준히 받아도 미세한 조직은 못 찾는 경우도 있다. AI가 사람이 못 찾은 암을 1년만 일찍 발견해도 생존율은 크게 올라간다. 루닛 AI는 폐암 환자가 암 진단을 받기 3년 전 찍은 엑스레이를 판독해 암을 발견하기도 했다. 연구진은 루닛 AI에 대해 “독자적인 판독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진단 수행 능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이런 기술력이 뒷받침되자 글로벌 의료기기 회사들이 루닛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헬스케어 기업인 GE헬스케어, 일본 최대 의료영상기기 기업 후지필름 등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세계 30개 국, 300개 이상 의료기관에서 루닛 인사이트를 쓰고 있다.
● 전문의 11명이 ‘매의 눈’으로 데이터 관리
“루닛 AI는 마치 내비게이션을 달고 운전하는 것과 같다.”
루닛의 AI 기술을 의료 현장에선 이렇게 비유한다. 의사 혼자 암 조직을 분석하는 것이 지도와 표지판을 보고 길을 찾는 것이라면 루닛 AI의 도움을 받으면 암 진단과 치료라는 목적지까지 더 빠르고 정확하게 갈 수 있다는 의미다.
혁신의 비결을 알려면 조직 구성을 보면 된다. 200여 명 직원 중 영상의학과, 병리과, 내과 등 전문의가 11명이다. 루닛은 전체 직원이 10명이 안 됐을 때부터 전문의를 데려왔다. 의료기반 스타트업이 병원과 협력하는 경우는 많아도 이처럼 많은 전문의를 연구개발 인력으로 채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급여나 조건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서 대표는 “의료 AI 스타트업들은 대개 딥러닝 기술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우리는 의료데이터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야 기술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구성원의 철학이 다르니 수집하는 데이터의 질도 달랐다. AI의 학습능력을 높이기 위해 고차원의 데이터를 끌어 모았다. 엑스레이에선 안 보이지만 컴퓨터단층촬영(CT)에서 암이 확인된 케이스 등 어려운 문제 풀이만 시킨 셈이다. 서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수학문제 풀이와 비슷해요. 쉬운 문제를 아무리 많이 풀어도 실력이 늘지 않잖아요. 응용 문제도 도전해야 AI도 성능이 향상됩니다. 그냥 대형병원 교수님들만 맡기면 연구를 목적으로 접근하겠죠. 루닛은 사내 전문의들이 제품을 위해 데이터를 요구하고 정제하면서 AI를 단련시켰습니다.”
● 힙합 청년, 암 정복에 도전
루닛이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창업’ ‘딥러닝’ 등 테크 산업에 관심이 많던 카이스트 공대생들이 2010년 의기투합해 창업을 준비했다. 자본금은 1000만 원. 리더 격인 백승욱 전 대표(현 이사회 의장)는 힙합동아리에서 만난 선후배 5명을 끌어 모았다. 이들은 ‘AI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한 배를 타기로 했다. 전기전자 공학, 산업시스템공학, 웹사이언스 등 대학원 전공 선택도 창업을 고려했다. 이들은 현재 알고리즘 개발, 영상의학 등 5개 분야를 총괄한다.
첫 도전은 의료 분야가 아니었다. 고객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찾아주는 AI를 내놓았지만 금세 접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취향이 중요한 패션 분야를 AI의 정확도를 내세워 접근한 게 패착이었다. 정답이 없는 분야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백 의장과 동료들은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AI가 가장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찾자”고 뜻을 모았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와 정착한 분야가 폐암과 유방암 진단 AI다. 발병률이 높고, 영상 데이터가 충분해 AI 학습이 용이하다고 판단했다. 백 의장이 서 대표에게 합류를 요청한 것도 그 무렵이다. AI 알고리즘만큼이나 의학 지식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KAIST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다. 생명과학과를 졸업한 서 대표는 서울대 의대로 편입해 전문의로 일하는 중이었다. 어려서부터 암에 관심이 많고 사업가가 되는 게 꿈이었던 서 대표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서 대표는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기술로 암 정복에 기여하는 것도 의사로서 의미 있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 기업가치 매년 두 배씩 커져
스타트업을 하기에 한국은 장점만큼 단점도 뚜렷하다. 디지털 환경이 좋고 변화에 민감한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는 좋은 토대다. 높은 교육열은 뛰어난 인재를 배출해낸다. 하지만 막상 시작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하면 발목을 잡는 게 한둘이 아니다. 루닛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AI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의료데이터를 활용할 때다.
“미국만 가도 아직 병원에서 엑스레이 필름을 쓰는 곳이 많죠. 반면 한국은 디지털화가 잘 돼 있고, 주요 병원에 방대한 암환자 데이터가 모여 있어 데이터를 빨리 수집하기에는 좋은 환경입니다. 그런데 그 데이터를 병원 밖으로 가져올 순 없어요. 미국은 법에 따라 개인정보를 익명화해 데이터 활용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법으로 보장합니다. 한국은 데이터 활용의 명확한 기준이 없어 병원들이 데이터에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어요.”
루닛에게 2021년은 특별하다. 가던트의 투자를 받으면서 누적 투자금액 1000억원 돌파를 앞두고 있다. 올해 매출은 지난해의 7배가 넘는 100억 원을 예상한다. 연내 코스닥 상장도 준비 중이다. 기술특례상장을 위한 기술성 평가에서 두 기관에서 ‘AA’를 받았다. 헬스케어 기업 중 최초다. 지난해 초 2000억 원 수준으로 평가 받았던 기업가치는 두 배로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직 갈 길도 멀다. 지금까지 폐암과 유방암 진단에 집중했지만 다른 부위의 암 역시 도전할만한 영역이다. 서 대표는 “암 검진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협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루닛의 꿈이 현실이 된다면 의료현장에는 또 하나의 훌륭한 내비게이션이, 한국 경제에는 또 하나의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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