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소비기한제’ 도입…“재고 줄고 환경 보호” vs “안전문제 우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5일 14시 38분


식품 유통기한제도가 내년 말까지 시행된 뒤 2023년 1월부터 ‘소비기한제’로 대체된다. 우유 등 일부 품목은 소비기한제 적용이 최장 8년 동안 유예되지만 기본적으로 먹거리 기한 표기의 기준이 바뀌는 셈이다.

소비기한(use-by date)이란 표시된 보관 조건을 준수하는 것을 전제로 소비자가 식품을 안전하게 먹을 수 있다고 보는 최종 날짜를 의미한다. 현재의 유통기한(sell-by date)은 기업이 소비자에게 식품을 유통 판매할 수 있는 날짜다. 유통기한이 식품의 품질 변화 시점을 기준으로 60~70% 가량 앞선 시한을 설정하는 반면, 소비기한은 80~90% 앞선 수준에서 설정하는 차이가 있다.

● 환경 위한 소비기한제 도입
지난달 2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온실가스 배출을 늘리는 식품 폐기물을 줄여 환경을 보호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 같은 명분에 공감하면서도 제품 보관 기간이 길어지면 음식이 변질돼 식품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통기한제는 1985년 도입됐다. 당시 국내 유통환경이 열악해 식품이 쉽게 변질되곤 했다. 이 때문에 ‘유통기한이 곧 소비기한’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이후 35여 년 동안 식품 제조기술과 냉장 체계 등 식품 제주 유통기술이 발달했지만 유통기한을 우선시하는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식약처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의 57%는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폐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통기한이 경과했다는 이유로 식품을 폐기하면서 발생하는 비용은 막대하다. 식품안전정보원에 따르면 각 가정이 섭취 가능한 식품을 폐기함에 따라 발생하는 비용은 연간 8조1419억 원에 이른다. 식품제조업체의 경우 연간 5308억 원의 식품 폐기 비용이 발생한다. 식품안전정보원 관계자는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변경하면 가정 내 가공식품 폐기와 식품업체 제품의 반품 및 폐기가 감소해 각각 8860억 원, 260억 원의 사회적 편익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따르면 2018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26%는 식품생산이 원인이고, 6%는 음식쓰레기로 인해 발생한다.

외국에서는 소비기한제 표기를 많이 사용한다. 유럽연합(EU)과 미국 영국 등은 소비기한을 사용하고 있다. 미국은 유통기한을 표시할 수 있지만 강제조항이 아닌 자율조항이다.

한국외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냉장보관을 잘 할 경우 계란은 유통기한 경과 후 25일, 우유는 45일까지 소비해도 된다. 슬라이스치즈는 70일, 두부는 유통기한 경과 후 90일까지도 섭취 가능하다. 다만 식약처 관계자는 “섭씨 0~5도 냉장 등 통제된 조건에서 진행한 실험이기 때문에 현실보다 품질이 유지되는 기간이 다소 길게 나타난 측면이 있다”며 “실제로 소비기한제가 도입될 경우 과학적인 판단을 거쳐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보수적으로 날짜가 설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소비기한제 적용을 유예할 구체적인 품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식약처는 냉장온도 기준을 강화할 필요가 있는 품목들을 위주로 선정해 하위 규정에서 정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이들 품목들도 최장 8년이 지나면 소비기한제가 적용된다.

● “매출 줄고 환경도 보호” vs “안전문제 생길 우려”
편의점이나 마트 등 유통업계는 소비기한 도입을 반기는 분위기다. 유통기한을 표기할 때보다 제품을 더 오래 판매할 수 있어 재고부담이 줄고, 매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국내 한 편의점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유통기한이 경과된 음식이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낭비가 발생했다”며 “소비기한이 도입되면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지니 점주 입장에서는 상품을 관리할 때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공식품 업계도 소비기한 도입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과자류를 생산하는 A 업체 관계자는 “그동안 충분히 판매할 수 있는 제품인데도 폐기해야하는 경우가 많았고 손실로 이어져왔다”며 “제품별로 안전성을 정확하게 담보하는 방향으로 기간을 늘리면 자원 낭비도 막는 일석이조 대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제품 관리에 대한 우려를 제기한다.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매장은 냉장관리를 잘 할 뿐 아니라 상품 회전율이 높아 재고가 장기간 쌓일 가능성이 낮다. 반면 회전율이 낮은 편인 중소형 매장은 소비기한이 다 될 때까지 팔리지 않는 상품이 상대적으로 많이 생길 수 있다. 제품의 신선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기한이 하루 이틀 남아있다 하더라도 냉장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안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낙농가와 유업계는 소비기한 도입을 우려하고 있다. 신선식품인 유제품은 다른 식품보다 변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원유 재고량이 늘어나면 수요와 공급의 순환이 느려져 업계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윤성식 연세대 생명과학기술학부 교수는 “우리나라 젖소의 99%는 ‘홀스타인’이라는 품종으로, 한 마리당 하루 우유생산량이 평균 30kg에 달할 정도로 많은 편”이라며 “소비기한 도입으로 가공과 판매가 느려지면 낙농 및 유가공 산업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유통, 소비기한 병기하는 대안 검토해야”
소비기한제 도입까지 1년 반도 채 안 남은 가운데 식품 안전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려면 식품 제조 유통업체와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과 관리체계 개선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유통 시 보관방법, 판매환경, 소비자 구입 후 보관방법에 따라 제품의 신선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아직 소비기한이라는 개념을 생소하게 여기고 있다. 한국외식산업연구원이 올 2월 국내 외식업체 종사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소비기한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44%가 ‘알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정보 격차가 큰 고령층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식품을 잘못 섭취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60대 주부 B 씨는 “여러 매체를 통해 유통기한이 조금 지난 가공식품을 먹어도 괜찮다는 정보를 접해왔지만 정작 제도가 바뀌면 한동안 헷갈릴 것 같다”고 말했다.

도입 초기 혼선 방지를 위해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을 병기해야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식품회사들은 소비기한과 유통기한을 병기하려면 관련 설비를 교체해야 해 비용부담이 커지고 결국 물가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먹거리 안전을 위해 기한을 병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은희 교수는 “특히 냉장식품의 경우에는 소비기한과 유통기한을 병기할 필요가 있다”며 “소비기한이 임박한 상품이 시장에서 대거 유통될 수 있는 만큼 기한 병기를 통해 매장에서는 유통기한까지 판매하고, 소비자들은 소비기한까지 섭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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