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인터뷰 | 신동원 농심 회장]
아버지 그늘에 가렸던 은둔의 경영자, 농심 경영을 해부하다
‘NYT가 꼽은 세계최고 라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농심 辛라면 父子의 40여년 경영스토리
카리스마 강했던 아버지, 소탈하고 부드러운 아들
신라면 개발한 故신춘호 회장, 신동원 회장은 ‘건면’으로 승부
신동원(63) 농심 회장은 재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최고경영자다. 아버지 고(故) 신춘호 회장의 카리스마가 워낙 강해 아들은 아버지 그늘 밑에서 소리 없이 경영을 챙겨왔다. 외부에선 존재감 없이 비쳐졌지만 아버지와 함께 명운을 걸고 농심을 경영해온 주역이다. 신 회장은 1965년 롯데 공업에서 출발한 회사가 1978년 농심으로 사명을 바꾼 1년 뒤인 1979년에 농심 해외사업부 사원으로 입사했다. 고려대 화학공학과 4학년 때였다. 지금까지 무려 42년을 농심에 몸담은 ‘농심 신화’의 주인공이다.
지난 3월 27일 아버지 신춘호 회장이 89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2세 경영인인 신동원 부회장에게 이목이 쏠렸다. 2010년 3월 농심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등극한지 11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부회장 꼬리표를 떼지 못한 터였다. 선친의 49재를 지날 무렵 자연스레 신동원 회장 취임 얘기가 나왔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나 됐다고…”라며 회장 취임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유래 없는 팬데믹 사태를 맞아 급변하는 경영 환경에 언제까지 총사령탑의 자리를 비워놓을 수는 없다고 주변에선 채근했다. 그래서 당초 내년 초 쯤으로 예상한 회장 취임식은 반년 앞당겨진 7월 1일에 거행됐다.
신동원 회장 취임 후 70일이 지났다. 그동안 아버지의 빈 공백을 메우느라 경영에 몰두한 그는 언론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10일 신 회장을 단독 인터뷰했다. 40여 년 동안 농심을 경영한 소회와 2세 경영인으로서 신라면으로 대표되는 ‘농심호(號)’를 앞으로 어떻게 운항해나갈지를 들어봤다.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가다’
그는 1987년 11월부터 1991년까지 4년 동안 일본에 근무했다. 직책은 동경지사장(이사)이었다. 왜 일본을 택했을까.
“1986년부터 일본에 본격 수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선대 회장님께서 전략 시장인 일본에 누구를 보낼까 무척 고심하셨어요. 제가 가겠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옛말처럼 앞으로 라면으로 정면 승부하려면 라면 발상지인 일본에 가서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한국이 따라잡기 어려운 선진국 반열에 이미 올라서 있던 때였다. 일본 기업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현장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떠오르는 업종을 지켜보면서 우리나라에 접목시킬 방안을 궁리했다.
“주말마다 슈퍼마켓 등 유통채널을 자주 찾아갔습니다. 어떤 제품에 손님들의 손이 가는지, 저런 제품이 한국에서도 팔릴 수 있을지 고민했지요. 생수와 택배, 펫푸드, 신용카드, 홈쇼핑을 한참 눈여겨봤습니다. 당시 맥주시장에서 3위였던 아사히가 슈퍼드라이 맥주를 선보이면서 시장점유율을 한 자리 수에서 20%까지 끌어올리더군요. 단숨에 시장점유율 2위가 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1997년 아사히는 기린맥주까지 제치고 일본 맥주시장 1위에 올랐다. 지난해 기린이 아사히를 다시 이기기까지 무려 2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라면 본산지인 일본에서 라면을 배우러 간 신동원은 일본 시장에서 선진 유통업의 다양한 모습을 체득할 수 있었다.
“아사히가 2등으로 치고 올라온 때는 농심이 1985년 국내 라면시장에서 1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영원한 1등은 없다’는 말이 뼈에 사무치게 다가왔습니다. 시장 흐름을 재빨리 읽고 새 제품을 선보이며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킬 때만이 1등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1989년 우지(牛脂) 파동은 한국 라면산업의 위기였다
40년 넘게 농심을 경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을까. 그는 1989년으로 시계추를 돌렸다.
“1989년 우지 파동은 라면산업 전체의 위기였습니다, 공업용 기름을 사용한 한 회사의 문제가 라면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번졌습니다. 당시 선대 회장님은 ‘라면업계 전체의 발전 없이는 농심의 성장도 기대하기 어렵다. 위기에 처한 라면 회사들을 구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전사적으로 달려들어 검찰과 보건사회부, 언론사 등을 방문해 과학적 근거를 갖고 설득하면서 업계를 대변했습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마침내 라면이 불량식품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그는 지금도 이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했다. 미디어 홍보의 중요성도 이때 깨달았다. 지금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신라면블랙은 사실 10년 전인 2011년 4월 시장에 선보였던 야심작이었다. 그런데 출시 4개월 만에 생산을 접어야 했다.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라면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영양가가 없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내놓은 게 프리미엄 제품인 신라면블랙이었어요. 1600원짜리 고급라면으로 시장에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당시 신라면 가격이 730원일 때니까 2배 이상 비쌌죠. 하지만 당시엔 이명박 대통령이 강력한 물가안정책을 고집할 때였어요. 느닷없이 공정거래위원회가 전격적으로 회사에 들이닥쳤어요.”
공정위는 겉으론 가격 책정에는 별 문제를 삼지 않았다. 제동을 건 것은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이 담겨 있다’는 광고 문구였다. 허위 과장이라는 것이었다. 라면포장지에 적힌 신라면블랙의 영양성분과 밥 한 공기까지 포함하는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가를 단순 비교한 것이었는데 이것에 철퇴를 내린 것이었다. 2011년 6월 공정위는 시정명령과 함께 1억5500만원의 과징금을 때렸다.
“공정위 발표 후 신라면블랙 매출이 곤두박질쳤어요. 가격을 150원 내렸지만 손해를 감당하기기가 어려웠지요. 급기야 생산중단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품고급화 전략으로 가격을 차별화하려 했지만 물가 안정을 기치로 삼은 정부 방침 때문에 기업의 혁신 노력은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신라면블랙에 대한 고객 수요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국내에선 판매가 중단됐지만 미국과 중국 등 현지공장에서 생산과 판매가 계속됐다. 30개 국가로 수출될 정도로 프리미엄 라면에 대한 수요는 뜨거웠다. 심지어 국내 마트에선 신라면블랙을 역수입해서라도 팔 궁리까지 하고 있을 정도였다. 정부 규제로 인해 국내 고객들의 선택이 제약 당하는 역차별을 받았던 것이다. 고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이듬해인 2012년 10월 신라면블랙은 다시 시장에 나올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것이 지난해 6월 17일자 뉴욕타임스가 ‘세계 최고의 라면(the best instant noodles)’으로 꼽은 신라면블랙이다. 정부의 지나친 규제가 민간의 혁신을 발목 잡은 사례로 기록될만한 사건이다.
●“글로벌 넘버원 라면회사 만들 것”
농심은 신라면으로 성장한 회사다. 라면 시장에서 세계 5위인 회사를 글로벌 넘버원 회사로 만드는 것은 신 회장이 일궈내야 할 숙제다. 고(故) 신춘호 회장은 신라면을 평생 연구하면서 제품 차별화를 꾸준히 일궈냈다. 신라면블랙도 선친의 작품이었다. 신동원 회장은 농심의 사업포트폴리오를 앞으로 어떻게 구축해 나갈까.
“라면시장에서 글로벌 1위가 되는 것은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나갈 목표입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성장 동력도 키워나갈 것입니다. 건강기능 식품과 대체육, 비건식품을 육성하려고 합니다. 콜라겐 사업은 농심의 단백질 기초연구 역량을 사업적으로 재편하고 확대한 사례입니다. 지난해 3월 첫 제품을 내놓은 뒤 비타민, 프로바이오틱스, 단백질 등 좋은 성분을 포함하는 다양한 제품을 내놨습니다. 지금까지 400억 원어치 이상을 팔았습니다. 대체육과 비건식품은 농심의 콩단백 개발 역량을 토대로 개발한 것으로 뛰어난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모델을 발굴해 나갈 계획입니다.”
그는 7월 취임사에서 ‘미래&성장’을 화두로 제시했다. 지금까지 잘 해온 것은 계속 잘 해 나가고, 잘못한 것이 있다면 고쳐나가겠다고 임직원들에게 약속했다. 신 회장은 “미래가 곧 성장이며 성장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고 밝혔다. 농심은 최근 푸드테크 스타트업을 발굴해 적극 투자하고 있다. 회사 내에서 스타트업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신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프로젝트다.
●신라면 ‘건면’에 승부수 던지다
신라면블랙은 작고한 신춘호 회장의 작품이었다. 신동원 회장은 한발 나아가 ‘건면’에 공을 들이고 있다. 국물 없는 라면을 상상하기 어려울 때 그는 건면에 승부를 걸었다. 문제는 신라면 고유의 맛을 건면에 오롯이 담아내는 것이었다.
“‘건면은 맛이 없다’는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싶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신라면 맛에 건면을 접목한다면 ‘맛있는 건면’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어요. 제품 개발에서부터 출시까지 전 과정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며 챙겼습니다. 연구소에도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당부했고요.”
선대 회장은 2007년 부산 녹산공단에 건면 전용 생산 라인을 갖추고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면서 시장을 개척했다. 하지만 미끌거리는 면의 특성이나 국물을 면발에 품지 못하는 한계로 히트작을 내놓지는 못했다. 1990년대 선보인 멸치칼국수나 2008년 둥지냉면 후루룩국수 등 다양한 건면을 시도했지만 고객 반응은 별로였다.
유탕면을 기름에 튀기지 않는 건면으로 바꾸면 국물 맛도 완전히 달리진다. 이 때문에 기존의 신라면 맛을 지키는 게 과제였다. 면과 스프, 별첨, 포장까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제품 개발에 나섰다. 개발에서 출시까지 꼬박 2년이 걸렸다. 2019년 2월 마침내 신라면 건면이 선보였다. 신라면 고유의 맛을 살리면서 담백하고도 깔끔한 맛의 건면이 나오자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한인보다 미국인이 더 찾는 신라면
지난해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에 등장한 ‘짜파구리’는 세계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절묘하게 섞은 음식이었다. 농심은 짜파구리를 실제 제품으로 개발해 미국 등 글로벌 시장에 내놓았다. 신 회장의 글로벌 시장 전략을 들어봤다.
“지금 신라면은 세계 100개국에 수출되고 있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습니다. 세계 주요국 대도시 뿐 아니라 지방에까지도 유통 판매망을 넓히고 있습니다. 미국에선 2018년에 이미 한인마트나 아시안 마켓에서의 매출보다 월마트, 코스트코 등 현지의 메인 유통점 매출이 앞섰습니다. 한인들보다 미국인들이 더 많이 찾는 제품으로 각인돼 있는 것이죠. 미국에서처럼 신라면을 한인보다 현지인에게 더 잘 팔리는 글로벌 제품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전략의 핵심입니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공장을 갖고 있는 농심은 북미시장의 매출이 매년 두 자리 수 성장을 거듭하면서 LA에 제2공장을 짓고 있다. 연말 가동을 목표로 한 2공장이 완공되면 연 5억 개 생산하던 라면을 8억5000만개까지 만들 수 있게 된다. 북미시장은 물론 멕시코 등 남미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전초 기지를 맡게 된다. 다양한 세계인의 입맛을 충족하겠다는 것이 신 회장의 포부다.
●‘소탈한 회장님’으로 사내에서 불려
농심은 1986년 매콤한 맛의 새 라면을 내놓으면서 ‘신(辛)라면’으로 브랜드를 지었다. 당시 신춘호 사장이 자신의 성을 따 ‘신라면’ 브랜드를 작명한 것이었다. 한자로 ‘매울 신(辛)’자를 썼으니 ‘매운 라면’이란 뜻이지만 공교롭게도 신 회장의 성(姓)과 같아 주변에선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신춘호 사장은 자신의 성을 과감하게 달아 시장에 내놓았다. 자신의 성을 내걸면서까지 제품을 만들 정도로 품질을 책임지겠다는 의지였다. 강력한 카리스마였다. 이런 아버지에 비해 아들은소탈하고 직원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먼저 경청하는 것이 소통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더는 무게를 잡기보다는 농담도 할 줄 아는 친근감이 있어야 직원들이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직원들과 편안한 분위기에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편입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영업 현장과 생산공장을 꾸준히 찾았습니다. 현장에서 우수한 사례를 발굴하면 다른 공장에도 전파될 수 있도록 현장을 챙겼죠.”
상무 시절 그는 직원들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이야기기 길어지면 2차로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계획에도 없던 자택 방문에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직원들은 밤늦게 까지 격의 없이 오너 2세와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일본 출장 중에는 백 팩을 맨 채 전철을 타고 시장조사를 나가기도 했다. 공항에 배웅 나가는 것도 업무에 방해된다며 거절했다는 것은 아직도 직원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다. 엄격한 이미지의 아버지와 달리 신동원 회장은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소통한다. 고(故) 신춘호 회장은 라면과 스낵, 생수 등 신제품 개발에 열정을 쏟고 광고도 직접 카피를 만드는 등 하나하나 다 챙겼다. 영업과 생산을 경쟁시키듯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은 달랐다. 현장 직원들 목소리를 먼저 듣고 ERP(전사적 자원관리)와 BPR(업무과정 재설계) 등 경영시스템의 선진화, 새로운 제도 및 사업 개척 등 아버지가 놓친 부분을 꼼꼼하게 챙겼다.
●촘촘한 재계 인맥
그는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과 막역한 사이다. 10살 아래 막내 여동생의 남편이 서 회장이다. 가끔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기업 현안을 놓고 토론을 즐길 정도로 막역하다. 그룹을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나갈지에 대해서도 정보를 공유한다. 화장품과 라면의 큰 시장인 중국은 언제나 화제거리다. 그의 재계 인맥은 어떨까.
“고교와 대학 동문인 이웅렬 코오롱 회장, 그리고 허태수 GS그룹 회장과 친분이 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는 골프를 함께 하기도 했지요.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과 구본식 LT그룹 회장과는 친구입니다. 막내 동생(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의 친구인 최태원 SK그룹 회장과는 학생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인물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이끈 주요 대기업 창업자들을 주저 없이 꼽았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산업 기반이 없던 척박한 시절에 굳은 열정과 헌신으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신 분들입니다. 이 분들을 빼고 한국 경제를 논하기가 어렵지요. 많은 종업원들을 채용하고 세계 속에 한국의 입지를 다졌기에 오늘의 한국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거목(巨木)들이지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도 해외시장에 대한 불굴의 도전 의지로 대한민국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이 분들의 기업가정신을 오늘 한국의 기업인들 모두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과학자가 꿈이었던 화학공학도
그는 고려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어릴 적 꿈은 과학자였다. 오너 2세로 농심에 입사하고 경영 수업을 받게 되면서 고려대 대학원에서 무역학 석사를 받았다. 과학자에서 경영자로 인생의 행로가 바뀐 것이다. 훌쩍 들어선 60대, 아쉬운 게 없었을까.
“화학이라는 학문은 특정 물질의 목적에 맞게 특성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목표를 이루려면 변화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고, 때론 반응을 폭증시키는 촉매를 사용하기도 하지요. 지난 7월 회장을 맡으면서 직원들에게 변화를 주문했습니다. 경영을 하면서 화학의 기본 원리를 늘 염두에 두고 있지요.”
취업난에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어봤다.
“청년들이 자신의 강점을 잘 살려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자격증과 스펙을 쌓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 또 잘 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전문성을 쌓아나가야 해요. 여기에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성과를 만들어 내는 소양을 갖춘다면 어디서나 인정받고 존중받는 인재가 될 것입니다. 농심의 인재상은 ‘인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을 이루어내는 인재’입니다. 신입사원을 뽑을 때 이런 점을 늘 눈여겨봅니다.”
신 회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라면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농심의 최고사령탑이다. 그는 “라면의 가치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힘쓰고 라면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식문화를 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라면은 더 이상 배고픔을 달래주는 개발경제 시대의 끼니가 아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신 회장이 주창하는 ‘소비자의 인생을 더욱 맛있게 하는 라면’을 글로벌 시장에서 어떻게 하나하나 만들어나갈지 무척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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