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반도체 공급난에 대처해야 한다는 이유로 삼성전자,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에 재고, 수요 등 기업 내부정보 제출을 요구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동남아 지역에 확산돼 반도체 칩 조립 라인이 멈추는 등 공급난이 악화되자 전례 없는 요구사항을 꺼낸 것이다.
23일(현지 시간) 미국 백악관과 상무부는 삼성전자, 미국 인텔, 대만 TSMC 등 반도체 제조사 관계자를 모아 ‘반도체 대책 화상회의’를 열었다. 3번째 대책회의다. 앞선 두 차례와 마찬가지로 반도체 수요처인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 자동차 제조사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정보기술(IT) 기업도 참석했다. 삼성전자에선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장(사장)이 온라인으로 참여했다.
브라이언 디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이 주재한 회의에서 미 행정부는 삼성전자 등 반도체 기업에 45일 안에 재고, 수요, 판매 정보 등을 담은 설문지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현황을 점검하거나 미국 내 생산시설 확충을 제안한 앞선 2차례 회의와 비교하면 훨씬 강경한 조치를 내놓은 것이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반도체 부족 문제는 최우선 과제였다”며 “(기업이) 투명성을 제공해야 미국 근로자와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러몬도 장관은 회의 직후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더 공격적으로 대처할 때”라며 “기업들이 정보를 제출하면 병목 현상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알아내고 문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업들이 협조에 응하지 않을 때 취할 조치가 있다. 거기까지 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야 한다면 그럴 것”이라는 압박도 가했다.
업계에서는 러몬도 장관의 압박이 미국 정부가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동원해 기업 정보 제출을 강제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본다. 1950년 한국전쟁 때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 만들어진 DPA는 미 정부가 코로나19 백신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발동한 바 있다.
반도체 업계는 미국 정부가 예민한 기업 내부 정보까지 요구한 것은 그만큼 공급난을 심각하게 보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1년 가까이 이어지는 반도체 부족은 내년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최근 말레이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 지역 반도체 패키징 공장이 멈춰 서며 병목 현상이 심화됐다. 포드, GM 등 북미 자동차 공장 10여 곳은 몇 주씩 생산을 중단했다. 동남아 부품 의존도가 높은 일본 도요타는 이달 글로벌 자동차 생산량을 계획 대비 40%나 감산했고 현대자동차도 울산, 아산 공장 생산라인을 일부 시간만 가동하거나 주말 특근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산량을 조절하는 등 전 세계적 문제로 확산됐다. 상황의 심각성 때문에 미국 정부가 민간에만 맡겨선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적극 개입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국 정부의 압박이 강해짐에 따라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제조사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는 미국 현지에 20조 원 규모의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을 지을 계획이지만 이날 회의에서 구체적인 위치나 일정 등은 발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측은 “정보 제공 시한과 주제만 정했을 뿐 아직 구체적인 항목을 미국 정부가 얘기하지 않아 대응 방침을 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고객 정보 등이 담겨 있을 수 있어 민감한 자료인 데다 정부 차원에서 요구한 것도 이례적이라 기업엔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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