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문 서민금융진흥원장
“상담하면서 엉엉 우는 서민 보듬지 않으면 나락의 길 빠져”
UN이 선정한 ‘글로벌지속가능리더 100인’이 된 서민의 벗
저신용자 24시간 상담앱 개발 코로나19에 빛 발해
이계문(61) 서민금융진흥원장은 경기도 가평의 깡 촌 출신이다. 아버지를 3살에 여의는 바람에 18살 더 많은 형과 어머니 손에서 컸다. 경기 가평군 현리의 면소재지에 있는 조종고를 졸업했다. 한 반은 인문계, 또 한 반은 농업계인 종합고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동국대 산업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삼성그룹 공채에 합격했지만 ROTC 복무를 마친 27살에 늦깎이 고시생이 돼 공부를 시작했다. 몇 차례 낙방 후 31살 때인 1990년 34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고시로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시절,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다. UN 산하 공인기구인 SDGs 협회는 지난 8월 그를 ‘글로벌 지속가능 리더 100인’에 선정했다. 한국에선 구광모 LG그룹 회장, 방탄소년단(BTS)이 이름을 올렸다. UN은 왜 그를 주목했을까. 지난 달 2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서민금융진흥원 집무실에서 이 원장을 만났다.
●토끼 키우고 농사일 돕던 어린 시절
그는 ‘흙수저’였다. 세살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6남매 중 막내인 그는 큰형 보다 18살이 적다. 형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다. 농사를 짓는 어머니는 5일마다 한번씩 열리는 시골 5일장에 나물을 이고 가 팔았다. 가족이 모두 노동력이 돼야 먹고 살 수가 있었다. 어린 계문도 틈틈이 농사일을 돕고 토끼도 키워야 했다.
그가 다닌 가평군의 조종고는 요즘으로 치면 특성화고다.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 재경관으로 근무할 때 워싱턴을 찾은 유일호 당시 경제부총리가 “조종고가 어디죠?”라고 물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학교다. 서울대가 대부분인 기획재정부에서 그는 시골 고등학교에 동국대를 나온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해 뛰어난 성적을 보인 계문에게 지도교수는 공부를 더 하는 게 좋겠다고 해 카이스트에 진학하려고 마음먹었다. 마침 친한 친구가 카이스트에 합격한 터였다. 당시 카이스트 석사과정에 들어가면 군 복무를 면제해 주는 프로그램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군 주둔지 근처에 살아 군인들의 모습을 보아온 큰 형은 계문에게 “ROTC를 하면 취직이 잘 된다”며 ROTC 복무를 권유했다. 삼성그룹 공채 시험에 합격해 신입사원 연수를 받은 뒤 군 복무를 했다.
●늦깎이 고시생이 되다
군 복무를 끝내자 삼성에선 1주일 내에 복직하라고 알려왔다.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됐다. 편안한 직장 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문을 두드려 볼 것인가. 소위로 복무하면서 받은 월급이 14만3000원이었다. 이중 매달 9만원씩 저축을 했다. 제대 때 통장을 보니 300만원이 쌓여 있었다. 지금 물가로 따지면 3000만 원가량 되는 큰 돈이었다. 이 정도면 집에 손 안 벌리고 다른 미래를 설계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손을 벌릴 데도 없었다. 큰 형은 이미 조카들이 자라 막내 동생에게 지원할 여유가 없었다. 카이스트에 다니던 친구가 과학도 보다는 행정고시가 더 유망하다고 귀띔해줬다. ‘고시계’라는 수험 잡지를 사다주기도 했다. 시골 5일장에서 나물을 파는 어머니께 차마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내가 너를 위해 돈을 좀 모아놓았어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께 군에서 모아놓은 돈이 있다고 했다. 2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 원장은 눈물을 글썽인다.
가평의 시골 빈집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27살 때였다. 첫해 1차는 낙방이었다. 무엇보다 영어가 너무 힘들었다. 농촌 종합고를 나온 그가 영어를 잘 할리 없었다. 그렇다고 학원에 다닐 돈도 없었다. 다음해 1차에 겨우 합격했지만 2차 시험에선 떨어졌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그에게 논술로 치르는 2차 시험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통계학이나 숫자로만 공부하던 것과 논술은 별개 세상이었다. 서양철학사와 논리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논술의 기초가 되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도전한 1차 시험에서 붙었지만 2차 시험에선 0.04점 차로 떨어졌다. 낙방의 아쉬움보다 다음엔 붙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3문제를 주고 20페이지를 작성해야 하는 논술시험에서 당락이 갈렸다. 다음해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행정고시 재경직이었다.
●철저하게 성과로 평가받는 기획재정부 문화
당시 행시에서 최고 인기를 끈 재경직 석차는 행시 전체 석차와 엇비슷했다. 학부에 행정학과가 없는 서울대에서 경제학과 경영학과 학생들이 재경직에 도전했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에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대부분 서울대 출신이었다.
“첫 발령을 받았는데, 7급 주무관이 ‘왜 여기를 오셨나’고 해 당황했어요. 나이도 많았고 죄다 서울대 출신인데 국장까지 오를 수 있겠느냐는 얘기였죠. 경쟁이 덜한 다른 부처에 가면 쉽게 국장까지 승진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연세대 고려대 졸업생도 찾아보기 어려운 경제기획원에서 오히려 계문은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서울대 출신이 주류여서 학연보다는 오로지 실력으로 평가받았다. 성실한 계문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경기고-서울대(KS) 출신 상사들과 일하는 게 오히려 편했단다.
“기재부는 밑에서 일을 못하는 부하를 데리고 있으면 자기가 한 방에 날라 가기 때문에 오로지 실력 있는 사무관이나 서기관이 발탁됩니다. 한번 실수는 봐주지만 두 번 똑같은 실수를 하면 다음 인사 때 어디로 갔는지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죠. 상사들이 일 잘하는 부하와 못하는 부하를 금방 파악합니다. 본부 과장을 못하고 옷 벗는 사람도 있었어요. 해외에서 재경관을 했던 사람인데, 장관이 현지 방문 했을 때 본부에 전문(電文)을 쳐 보고를 했는데, 그게 형편없었던 거예요. 이게 소문이 나면서 누구도 같이 일하려고 하지 않았던 거죠. 일을 못하면 보직을 빼앗아버리는 냉정한 곳이 기재부입니다.”
일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계문은 인사 때마다 두 군데 이상에서 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모신 상사 중에서 장관이 된 사람만 14명이나 됐다. 특히 윤증현 전 장관의 경우 국장과 실장 장관으로 모셔 좋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시절엔 경제종합대책을 3번이나 발표할 만큼 일복에 치여 살았다. 부총리 격려금까지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재경부 기획조정실에서 대통령 업무보고 자료는 그의 몫이었다. 산업자원과 외화자금과 서비스경제과 정책기획관 등 예산과 금융, 거시정책을 두루 맡았다. 주미한국대사관 워싱턴 재경관에 이어 현장을 뛰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기재부 대변인도 맡았다.
●서민금융진흥원장 취임식 대신 현장으로
27년의 경제관료 생활을 끝낸 2018년 10월 그는 서민금융진흥원 원장에 취임했다.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하는 자리다. 가평 농촌의 서민 출신인 그가 서민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서민금융진흥원은 신용등급이 낮아 은행에서 대출이 거절된 사람들이 불법 사금융이나 고금리 대출에 빠지지 않도록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대출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신용보증기금이 돈이 필요한 중소기업에게 보증을 서주는 곳이라면, 서민금융진흥원은 신용등급이 낮은 서민들에 보증을 서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해준다. 대출 후 빚을 갚지 못해 독촉에 시달리는 경우엔 신용회복위원회를 찾아가면 연체이자를 탕감해주고 원금도 일부 면제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 원장은 “서금원이 환자를 위해 투약하는 약국이라면 신복위는 외과 수술을 하는 병원인 셈”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패자부활전’을 위한 기회의 장(場)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잘 모르는데다 ‘사회적 낙오자’라는 낙인이 두려워 선뜻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곳이다.
첫 출근 날 취임식을 마다하고 서울 관악센터를 찾아 사람들을 만나 상담부터 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경제관료 때 몸에 밴 신조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국에 산재한 50개 센터 가운데 44개를 찾아 상담을 했다. 전통시장도 31곳을 찾아 나섰다. 현장에서 만나 직접 얘기 나눈 서민이 117명이나 된다.
“상담을 하다보면 엉엉 우시는 분들이 적지 않아요. 빚이 많아 부끄럽다고, 주체할 수 없는 부채의 늪에 시달리면서 고통을 받아온 것이지요. 코로나19로 생활이 어려워진 영세 자영업자나 저소득 근로자, 프리랜서 등 수입이 뚝 끊긴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요즘엔 청년들도 취업을 못해 아르바이트조차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서민금융 뿐 아니라 금융 전반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 안타까웠습니다.”
●코로나19에 빛난 챗봇과 앱
돈이 모자라 궁지에 몰리는 사람들은 잘 나서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에게는 어렵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낙인 효과’ 때문에 끙끙 앓기만 하다가 극단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원장이 집무실에 있지 않고 현장을 찾아다니는 이유다. 신용점수 하위 10% 이하 계층인 신용등급 7등급 이하가 379만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221만 명이 연체 상태에 있다. 은행이나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해줄 리가 없다. 돈이 필요하면 대부업이나 불법 사(私)금융을 찾아야 하는 처지다.
이 원장은 직원들과 함께 고객인 저소득 취약 층이 있는 곳을 찾아 자원봉사에 나섰다. 요즘 입사하는 직원들은 서민들 어려움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쪽방촌 도시락 봉사와 배식 봉사, 장애인 농장을 찾고 미혼모 시설을 방문했다. 고금리 일수에 허덕이는 전통시장 상인들도 찾아 상담을 진행했다. 상대방 입장에서 어떻게 서금원과 신복위가 지원을 할지 찾아 나섰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24시간 상담 앱과 챗봇이었다.
“저희 고객들은 모두 생업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어렵게 찾아온 고객이 서류 작성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창구에서 수기로 써야했던 종이를 싹 없애고 신분증 하나만으로도 바로 상담할 수 있도록 했지요. ARS를 이용한 콜센터도 상담사가 직접 받도록 했습니다. 문턱을 낮춰야 사람들이 찾아올 것 아닙니까. 생업에 바쁜 서민들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24시간 상담 받고 서민금융을 이용할 수 있도록 챗봇 상담과 앱을 지난해부터 선보였지요.”
24시간 상담 가능한 앱은 지난해 코로나19로 빛을 발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고객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이 원장의 경영철학이 위기에 돋보인 것이다. 불법 대출 광고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금리 대출에 손댄 취약 계층과 청년들에게 1인당 평균 880만원의 채무를 경감해주는 조건으로 유튜브를 통해 금융교육을 이수하도록 의무화했다. 저신용 저소득 서민들의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앱과 홈페이지에서 가장 유리한 대출상품을 비교해 선택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33개나 되던 입력 항목을 13개로 대폭 줄이면서도 20% 이상 고금리를 쓰던 서민들이 11.7% 금리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장을 중시한 이 원장의 경영방침은 현장에서 속속 구체적 성과로 나타났다. 이 원장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이었을까.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팬데믹 위기에 한국의 서민금융은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K글로벌 서민금융 모델이 된 ‘서금원’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이 원장은 기술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래서 서민들이 24시간 상담 가능한 앱을 만들어 코로나19에도 ‘K-서민금융’이라는 브랜드를 창출할 수 있었다. 유엔이 주목한 것도 이 부분이었다.
지난해 8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특별협의지위기구인 UNSDGs협회는 ‘2020 글로벌 지속가능 100’ 리스트에 서금원과 신복위를 나란히 올렸다. 이어 10월에는 ‘UN 지속가능개발목표경영지수(SDGBI)’에 애플, 아마존 등과 함께 최우수그룹으로 선정했다. 협회는 “저신용 저소득자가 24시간 언제라도 상담과 신청을 할 수 있도록 챗봇과 앱을 활용해 서민금융 상담의 편의성과 접근성을 확대하고, 서민 취약계층의 금융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맞춤대출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고객 관점의 서민금융 서비스에서 혁신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경사는 잇따랐다. 지난 8월 30일 이계문 원장은 ‘2021 글로벌지속가능리더100’ 리스트에 선정됐다. 지난 1년 동안 전 세계 주요 리더 2000명과 글로벌 기업 3000곳을 대상으로 선정한 결과였다. 팀 쿡 애플 CEO,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 사티야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방탄소년단(BTS), 구광모 LG 회장 등이 이름을 올렸다.
“대기업 구조조정하면서 든 돈이 얼마인지 아시죠? 기아차에 8조원, 대우그룹에 40조원, 대우조선해양에 10조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갔습니다. 엄청난 국민세금이 투입됐지만 노조는 모럴해저드에 빠져 있었어요. 서금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최고 3000만원, 평균 880만원의 자금을 지원해 줬어요. 제도권 금융에서 외면 받은 금융의 사각지대에 있는 서민들입니다. 소액일수록 빚은 갚으려고 해요. 시장의 실패로 인해 제도권 금융에서 방출된 이웃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직원들에게 우리는 월급 받으면서 남을 돕는 감사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유엔이 주목한 서금원의 앱은 지금까지 130만 건 다운로드 됐다. 이를 이용하는 고객이 130만 명이라는 얘기다. 5점 만점에 4.8점으로 1700만 명이 이용하는 카카오뱅크 앱 점수 4.3 보다 훨씬 높다. 공무원 하면 책상머리에 앉은 ‘탁상공론(卓上空論)’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시대. 가평 시골 출신의 계문은 경제 관료를 하면서도 ‘현장에 답이 있다’면서 평생 현장을 쫓아다니면서 살아왔다. UN이 그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이런 현장 경영의 결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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