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
‘국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없고, 없어야 할 곳에는 있다’ 발간
“증세와 규제완화 빅딜로 사회적 대타협 이뤄야”
“교수 시절 얘깁니다. 강의실 앞줄에 앉은 학생이 법정스님이 쓴 ‘무소유’를 들고 있기에 ‘재미있어?’라고 물어보니, ‘느낀 게 많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얘기했죠. ‘너 이제 큰일 났다. 이제 거지 되겠다’라고요.”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는 그 학생에게 “좋은 책이다. 하지만 마음의 고향으로만 삼아라”고 했다고 한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몸이 아프면 보살펴줄 사람이 있었고, 기거할 곳이 없으면 기거할 곳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김 교수는 “현실세계에서 보통 사람에겐 무소유는 궁핍이다. 보통의 많은 스님에게도 그렇다”고 가르쳤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습니다. 지난해보다 좀 더 벌고 싶어 하죠.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과 멋있는 곳에서 식사라도 한번 하고, 명품 지갑도 하나 사고, 주변이 어려운 사람들 많이 도와주기도 하면서 살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당연한 욕구지요. 그런데 성장이 멈추고 분배를 두고 싸움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어려워지는 사람은 늘 가지지 못한 쪽이죠.”
김 교수가 성장담론과 분배담론을 담은 책, ‘국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없고, 없어야 할 곳에는 있다’(도서출판 선)를 최근 발간했다. 그는 책에서 성장담론이 없는 분배정책은 ‘사이비 진보’라고 비판했다. 또한 분배담론이 없는 성장정책은 ‘사이비 보수’라고 꼬집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정책실장을 맡았고, 박근혜 정부 말기에는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던 그는 국민의힘 전신(前身)인 자유한국당에서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 진보와 보수를 넘나든 경력을 갖고 있다.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성장이 없으면 빈자(貧者)가 죽는다’
그는 먼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했다.
“그냥 돈만 뿌리는 정책입니다. 평소에 성장담론을 멀리해왔기 때문에 정책 마련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죠. 이름부터 국제노동기구(ILO)의 ‘임금주도성장’을 모방한 것 같아요. 문제는 소득을 늘리는 합리적 방안도 없고, 소득이 성장으로 연결되는 분명한 고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진보의 어설픈 성장 구호이자 분배 구호입니다.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거죠.”
김 교수는 “성장을 생각하지 않는 분배는 정책이 아니다”며 “경제정책이 아닌 것은 물론 사회정책으로서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간과한 것은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의 특성과 미국의 4배나 되는 자영업자의 비중 등을 고려하지 않은 한마디로 ‘이상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진보세력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스웨덴을 볼까요? 한국 진보들이 목숨 걸고 반대하는 영리병원이 스웨덴에 있죠, 심지어 교육도 학교선택제를 포함해 영리학원까지 있습니다. 노사 합의 아래 상장기업의 차등의결권도 인정하고 있어요. 분배 문제도 단단한 성장 정책의 틀 안에서 논의하는 겁니다.”
스웨덴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이지만 미국 보수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이 발표하는 경제자유도는 한국보다도 더 높다.
●분배담론이 없는 ‘사이비 보수’
김 교수는 “진보든 보수든 이젠 분배담론이 없으면 안 된다”면서도 “유감스럽게도 보수집단은 이 문제에서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보수는 잘 살고 못 사는 문제를 사회나 국가의 책임이 아닌 개인적 책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경기 불황의 여파로 청년과 노년층 영세 자영업자들이 시장체제 밖으로 밀려나면서 한국사회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고 꼬집었다.
“최근엔 보수 진영에서도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한 변화입니다. 다만 여전히 소극적인 자세가 주류지요. 매표(買票) 행위에 가까운 진보정권의 돈 뿌리기를 비난하지만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담론이 부족합니다. 왜 그럴까요? 보수 진영에선 이 문제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세월을 그동안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와 자본과 노동만 투입하면 생산이 일어나는 요소투입형 경제구조를 오랫동안 경험했기 때문에 분배 자체에 대한 관심이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이다. 여기다 가족 등 전통적인 공동체가 사회안전망으로서의 기능을 해왔다. 부모와 자식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서로를 돌보는 도덕적 책무를 갖고 있었다. 분배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걱정을 덜어줬다는 얘기다.
“이젠 이 모두가 지나간 세월의 이야기가 돼 버린 것이 현실입니다. 내수시장 비중이 커지고 있고, 경제도 혁신주도형으로 전환되고 있죠. 노인과 청년, 영세 자영업자들은 시장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어 시장 밖에 존재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시장에 맡겨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김 교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론, 성장을 위해서도 분배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분배 문제가 잘못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물론 시장경제 체제를 밑바닥부터 흔들 수 있어 ‘보수 버전’의 분배담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 버전 ‘수호천사’ 만들기
김 교수는 보수 진영에서의 분배담론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자유주의의 수호천사로서의 분배정책이 되려면 무엇보다 잘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구를 잊어선 안 됩니다.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축소와 고령화의 진전으로 시장 중심의 1차 분배에 원천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요.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시장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국가가 보듬어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분배담론은 ‘보충성의 원칙’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국가는 시장과 공동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데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죠.”
정부의 재정 투입보다 1차적 분배 기능을 하는 시장에서 불합리를 제거하는 데 더 관심을 둬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김 교수는 ‘21세기 자본’을 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연소득 50만~100만 불 이상 고소득자에게 80%의 소득세를 물리자고 한 주장을 예로 들었다.
“경제적 불평등이나 양극화가 더 이상 용인하기 힘든 상황까지 왔기 때문에 이런 과격한 주장이 나오는 겁니다. 속은 시원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열광할 문제는 아닙니다. 미국에선 경제 대공황 이후 소득세를 계속 올려 공화당 출신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땐 무려 91%까지 오른 적이 있었어요. 그러고도 미국이 망하지 않고 경제도 오히려 더 좋아졌으니 이런 얘기까지 나오는 거겠죠.”
하지만 당시 91% 세율 적용대상은 소득 20만 불 이상으로 그 수가 1만 명에 불과했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그것도 각종 공제제도가 있어서 상당 부분이 과세 대상에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상위 1% 부자에게 적용된 평균 세율은 40~45%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많은 부자들이 펀드나 투자은행 주식 등에 돈을 넣어 언제든지 움직이기 쉬운 구조로 갖고 있어요. 자본시장이 개방돼 서울에 있던 돈이 금방 뉴욕으로, 다시 이 돈이 런던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선 세금을 가파르게 올리면 아차 하는 순간 자본이 다른 나라로 이동할 것입니다.”
그는 분배정책의 우선 순위로 투자활성화 정책을 꼽았다. 누구나 맡고 싶어 하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임금을 주는 것이 경제적 가치를 배분하는 1차 파이프라인이라고 강조했다. 금융, 의료, 문화, 관광 등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돈이 제대로 된 산업에 투자될 수 있도록 흐름을 잡아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혁명적인 규제 완화로 기업과 개인의 상상력과 창의력, 혁신역량과 도전정신이 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 분배정책의 첫 단추를 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저계급론이 지배하는 세상
김 교수는 계급의 세습 문제를 걱정했다. 어떤 부모 아래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차디찬 믿음이 우리 사회에 정설이 돼 떠돌아다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금 수저, 흙 수저 같은 이른바 ‘수저계급론’이 대다수 국민들의 가슴을 때리고 있다”고 개탄했다. 문제는 상황이 저절로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있다. 시장의 분배 구조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주변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 대신 공동체가, 기업들이 시민정신을 발휘해 주면 좋겠지만 국가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진단이다.
“젊은 친구들이 실업급여 타먹는 데 정신이 팔려있다고 비난하지요? 많은 부분에서 지금 제도가 청년들이 정부의 푼돈이나 타먹는 구조로 만들고 있어요. 지금의 보장율과 기간으로는 ‘잔돈’ 수준이어서 모두들 그냥 챙겨먹을 대상이 돼 버렸습니다.”
김 교수는 현재 GDP(국내총생산)의 12.2%에 머물고 있는 사회비 지출을 장기적으로 OECD 평균인 20%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수백 개로 잘게 쪼개진 보조금 체계가 너무 어지러워 복지 수혜자가 놓치기 일쑤여서 기본소득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부(負)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처럼 대상을 선별적으로 할 거냐. 아니면 포괄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처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하는데 소득 파악에 대한 어려움을 생각하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포괄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부자에게 줄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부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부자가 언제 더 내더라도 더 내게 돼 있습니다. 이를 놓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증세와 규제완화 대타협 이뤄내야”
따뜻한 보수가 되려면 보수의 확고한 분배담론을 정립해야 한다고 김 교수는 거듭 강조한다. 문제는 돈이다. ‘증세 없는 복지’를 하겠다고 하지만 이는 국민을 속이는 일이다. 정부 지출에 대한 구조조정을 통해 돈을 마련하겠다는 좋은 말이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는 게 김 교수의 지론이다.
“GDP의 1%만 더 쓴다 해도 매년 20조원이 더 필요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구조조정해서 이 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부자 증세요? 물론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다분히 감정적인 접근일 뿐입니다. 최고세율 위에 한 구간 더 주자는 얘긴데, 그래서 얼마를 더 거둘 수 있을까요? 그래 봤자 몇 조원입니다. 그저 부자들 좀 더 힘들게 하자는 얘기밖에 안 되는 것이죠.”
김 교수는 복지국가 스웨덴을 거론했다. 스웨덴에선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사람이 연평균 소득 53만7200크로나, 우리 돈으로 7000만원 소득자에 해당한다. 평균소득의 1.6배에 해당하는 구간에 최고세율을 매기고 있는 것이다. 국가 재정의 중심이 상위 1%도 아니고, 상위 10% 아닌 중산층이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맡고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복지국가인 북유럽의 노르웨이 덴마크도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은 근로소득세 면제자 비율이 40% 안팎입니다. 법인세도 비슷해요. 영국이 5% 미만이고 대부분 국가에서 20~35% 정도입니다. 부자증세나 증세 없는 복지를 얘기할 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짐을 나눠지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국민개세(皆稅)주의와 함께 중산층 역할론이 강조돼야 합니다.”
그는 보수의 분배담론의 포인트로 법인세와 소득세의 실효세율 인상 카드와 규제 개혁을 맞바꾸는 대타협을 꼽았다. 기업과 자본은 보다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 받는 대신 세금 인상을 수용하고 국가는 이들에게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하는 대신 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할 재원을 얻는 것이다.
“부자를 죽여 빈자를 살릴 수 있을까요? 절대 어렵다고 봅니다. 부자와 빈자 모두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과 캐나다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 국가를 따라가자는 게 아닙니다. 광복과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에 이어 이제 한국 호(號) 어디로 가야할지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안전망이 갖춰진 자유주의 세상이 모델이 돼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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