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 위기 앞 그리운 이름, ‘경제사상가’ 이건희

  • 주간동아
  • 입력 2021년 10월 23일 14시 47분


‘초일류 기업’ 삼성 만든 ‘거인’… 여전히 나침반으로 유용한 삶과 생각

[사진 제공 · 삼성전자]
[사진 제공 · 삼성전자]
10월 25일은 변방의 대한민국을 글로벌 무대에서 당당하게 주류로 서게 한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이 타계한 지 1주년 되는 날이다. 1987년 취임한 후 5년 동안 공식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은둔의 경영자’로 불리던 이 전 회장은 1993년 6월 4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신경영을 주창하며 본격적인 삼성 경영혁신을 이끌었다. 그 결과 한국에서도 3위 기업이던 삼성은 오늘날 초일류 기업이 됐고, 지구촌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던 ‘메이드 인 코리아’ 또한 초일류 반열에 올랐다.

이 전 회장이 떠나고 1년, 현재 지구촌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창궐과 기후변화라는 위기 속에서 국제질서가 크게 출렁거리고 있다. 대한민국이 피 말리는 국제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뼈아픈 자기부정과 환골탈태가 시급한 상황이다. 어찌 보면 많은 이가 이런 전대미문의 위기 앞에서 20세기 세계 최고 전자회사 일본 소니를 앞지르고 21세기 초일류 기업 삼성의 초석을 닦은 이 전 회장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1980년대부터 4차 산업혁명 내다봐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전통적 제조업이 주류이던 한국 산업을 디지털 정보산업으로 바꿨다. [동아DB]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전통적 제조업이 주류이던 한국 산업을 디지털 정보산업으로 바꿨다. [동아DB]
“글로벌 코리아는 ‘비포 이건희’와 ‘애프터 이건희’로 나뉜다.”

최근 타계 1주기를 맞아 나온 이건희 평전 ‘경제사상가 이건희’는 이 전 회장이 대한민국에 남긴 업적을 이렇게 축약해 표현한다. 저자인 허문명 동아일보 부국장은 그간 이 전 회장을 다룬 책들이 리더십과 기업 경영 능력에 국한된 점과 차별화하고자 전직 삼성맨들의 증언, 고인이 남긴 글과 자료 등을 통해 기업인이 아닌 사상가로서 인간 이건희를 본격 조명한다.

이 전 회장을 만난 많은 이가 본능적으로 생전의 그를 단순한 경영자라고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고인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봤고, 늘 과거가 아닌 미래를 주시했다. 이 전 회장은 전통적 제조업이 주류이던 한국 산업을 디지털 정보산업으로 바꿨다. 1978년 삼성전관에 입사한 뒤 이건희 전 회장 취임 때 비서실 운영팀 과장으로서 ‘이건희 회장 비서실 1기’ 멤버가 된 박근희 전 삼성생명 부회장(현 CJ대한통운 부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건희 회장은 1980년대 말부터 ‘디지털 인력을 키워야 한다’거나 ‘소프트 경영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디지털’이라는 말은 글로벌시장에서 제품들이 막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인공지능(AI) 시대를 준비하는 것처럼 ‘아,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준비해야겠구나’ 정도의 생각은 할 수 있었지만, 소프트 경영이라는 말은 상당히 생소하고 추상적으로 다가와 ‘대체 무슨 말이지?’ 하는 분위기였다. 이 회장이 (현장 경험 없이) 부회장에서 바로 회장에 취임했으니 ‘뭐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하시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고, 당시 사장들은 ‘저러시다가 말겠지’ 했던 것 같다.”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 원장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소프트 경영을 주창했던 이건희 회장의 메시지야말로 고인을 기업인 이전에 사상가이자 철학자 반열로 볼 수 있게 하는 면”이라며 저자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980년대 말 ‘소프트웨어 인재 1만 명을 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인사팀에 강제로 명령해 소프트웨어 인력을 잔뜩 채용했는데, 몇 년 뒤 추적해보니 다들 엉뚱한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회장의 의도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몰랐던 거다. 돌이켜보면 이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을 이미 1980년대부터 내다보고 있었다.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이 뛰어났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기업가 이전에 사상가이자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마고우 회고 등 처음 공개되는 에피소드


[동아일보사]
[동아일보사]
책은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온 이 전 회장의 말과 개혁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고인이 28년 전 했던 말들이 마치 지금의 혼돈을 예감하고 있는 듯 촌철살인 메시지가 많다며 그의 말들을 인용한다.

“두뇌 산업으로 모든 걸 바꾸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정신, 환경, 제도, 시간의 위기라는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 그중에서도 정신적 위기가 제일 큰 문제다. 기업가는 투자 의욕을, 근로자들은 근로 의욕을 잃고 있다.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나 사회의 리더들은 앞장서서 문제를 풀어나가지 못하고 구심점 없이 표류하고 있다. 시대는 급변하는데 아직도 낡은 옷을 걸치고 과거의 제도와 관행에 얽매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나눌 몫이 적으면 피를 나눈 가족도 갈등한다. 파이를 더 크게 키우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이런 경제 전쟁에서는 끓고 있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죽는 줄도 모르고 무너질 수 있다. 이 전쟁의 패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책에는 처음 공개되는 인터뷰도 많이 실려 있다. 서울대 사대부중, 사대부고 동창으로 지금은 세상을 떠난 홍사덕 전 국회의원과 함께 고인의 죽마고우였던 인형무 변호사의 ‘학교 일진을 때려눕혔던 건희’, 기보 마사오 등 삼성전자 초기 시절 영입된 일본인 기술인 고문의 인터뷰, 야마자키 가쓰히코 전 니혼게이자이신문 서울지국장의 증언도 처음 공개되는 내용이다.

저자는 이 책이 단지 한 위대한 기업인에 대한 업적 찬양이나 위인전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이유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이때, 끊임없이 위기를 경고하고 변화, 혁신을 역설하던 고인의 삶과 생각이 힘과 에너지를 주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1993년 신경영 현장에서 변화를 진두지휘했던 고인의 말들이 지금 이 순간 미래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용한 실천적 지침이자, 앞날을 설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나침반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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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경 기자 hklee9@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11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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