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부당합병 의혹에 대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과거 골드만삭스의 투자 전문가와 나눴던 대화 내용이 공개됐다. 대화 내용에는 삼성전자의 미래와 관련한 내용이 담겨있었고 이를 볼 때 이 부회장이 당시 상속세보다는 사업전략에 대한 고민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지난 1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부정 혐의’ 재판에서는 한 건의 영문 이메일이 공개됐다.
변호인 측이 증거로 제시한 해당 이메일은 2014년 12월8일 미국 골드만삭스의 진 사이크스 당시 공동회장이 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형진 골드만삭스 한국대표 등 3명에게 보낸 것이다.
재계 등에 따르면 진 사이크스는 글로벌 투자은행(IB) 업계에서 IT, 이동통신, 미디어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로 정평이 나있던 인사로 미국 애플과 스티브 잡스를 전담했던 뱅커로 유명했다. 이 부회장을 알게 된 것도 잡스의 소개 덕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크스는 공개된 이메일에서 ‘제이(Jay·이재용 부회장)가 오늘 저를 만나러 왔다’면서 대화 내용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전달했다.
우선 사이크스는 이 부회장과의 대화 가운데 대부분이 삼성전자 사업 전반에 관한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고성능 부품, 디스플레이, 폼 팩터, 카메라 기술 등 하드웨어 측면의 제품 차별화,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 등 비메모리 사업 전략, 소프트웨어 분야의 투자 확대, 애플과의 지속적인 공급 관계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이 당시부터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전략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게 재계의 해석이다. 이 같은 내용들은 최근 삼성 갤럭시 폴더블폰의 성공이나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 선언,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등 소프트웨어 발전 전략, 애플에 대한 핵심부품 공급 등 실제 성과나 경영전략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아이폰의 ‘카피캣’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던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은 새로운 폼 팩터의 스마트폰인 ‘갤럭시 폴드’와 ‘갤럭시 플립’ 등 폴더블폰을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또 삼성전자가 1993년 이래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입지를 유지해온 가운데 이 부회장은 2019년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고 메모리반도체를 넘어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에 171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 부회장은 사이크스와의 면담에서 경영전략으로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당시 추진하던 방산·화학분야 등 비핵심 사업 정리를 언급한 뒤 “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 때문에 한국 정치인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고 한다”면서도 “핵심 사업에 집중하는 접근 방식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고 사이크스는 밝혔다.
이어 이 부회장은 “주주들과 다른 사람들도 소유구조를 보다 투명하게 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을 결국 인정해줄 것”이라고 말해 핵심 사업 집중 및 지배구조 투명화에 대한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사이크스는 또 당시 상속세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이 부회장)는 비록 한국 상속세와 미국 세금의 차이점에 흥미를 보이기는 했지만 부친께서 돌아가실 경우 발생할 세금 문제에 대처할 준비가 잘 돼있다고 말했다”고 이메일에서 소개했다.
이 같은 언급을 볼 때 상속세 문제는 당시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게 재계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재계 관계자는 “사이크스의 이메일 내용에는 이 부회장의 당시 고민과 철학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면서 “당시 대화 내용은 이후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의 사업 방향과 상당부분 맞아 떨어진다”고 말했다.
또 “골드만삭스 측 인사들과 만난 것은 경영권 승계나 지배구조 개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반적인 사업 현안과 미래 전략에 대한 자문을 받기 위한 것이었음이 확인됐다”며 “상속세 마련을 위한 삼성생명 지분 매각 논의를 목적으로 골드만삭스와 잇따라 접촉했다는 검찰 공소장 내용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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