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에도 고강도 가계부채 관리를 지속하겠다고 공언한 가운데, 특히 고신용자들에 대한 대출문이 더 굳게 잠길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서민 실수요자들을 위한 구제책으로 중·저신용자 대상 대출은 확대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고신용자들에 대한 엄격한 잣대는 유지할 방침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장 안팎에서는 내년에도 고신용자들에 대한 ‘역차별’은 어김없이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금융사들로부터 내년 중·저신용자 대출 비중 확대 목표치를 받고, 현재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 중이다. 최근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 강화로 인해 중·저신용자 대출과 정책서민금융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단 지적을 반영한 조치다. 내년 금융위가 내년 가계대출 총량관리 목표치를 올해(5~6%)보다 낮춘 4~5%로 제시하면서, 은행들이 중·저신용자 대출과 보금자리론 등 정책서민금융상품 취급을 일시 중단하거나 대폭 축소한 상황이다.
이에 고승범 금융위원장은 이달 초 기자간담회에서 “내년 가계부채 총량한도에서 중·저신용자 대출과 정책서민금융 상품을 제외하는 방안까지 검토할 수 있다”며 “구체적인 방안은 이달 중 확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금융당국은 내년 금융권 가계부채 총량관리시 중·저신용자 대출과 정책서민금융상품에 대해 충분한 한도와 인센티브를 부여한다는 방침이다. 또 인터넷은행 등을 적극 활용한 중·저신용자를 위한 중금리 대출도 확대되도록 지속 유도하기로 했다. 금융당국은 정책 서민금융을 10조원 이상 공급하고 중금리대출도 35조원 수준이 공급되도록 관리할 계획이다.
금융당국이 이 같은 방침을 밝히자, 인터넷전문은행 뿐 아니라 시중은행들도 일제히 중저신용자 대출 시장에서 활로를 모색하는 모습이다.
이재근 KB국민은행장 내정자는 지난 2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한 선별 대출을 시사했다. 이 내정자는 “가계대출은 보통 (연간) 7% 정도 성장했지만 내년은 4~5% 이하 성장으로 제한을 받는데 KB만이 아니라 모든 은행 문제”라며 “가계대출도 성장을 제한하는 건 우량고객들만이고, (신용등급) 7등급 이하인 저소득층 고객에게는 한도가 열려 있어 성장 기회로 탐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도 활성화시키고자 가계대출 한도에서 배제시켜줬다”며 “신용평가모형(CSS)을 정교화해서 선택적으로 (이들 고객군을) 어떻게 찾아내느냐가 은행 성과 차별화 요소”라고 강조했다.
타 은행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은행도 신용평가모델 적용 대상을 개인사업자까지 확대하고 네이버파이낸셜과 제휴한 ‘스마트스토어사업자(SME) 대출’ 상품에 반영했고, 신한은행도 조만간 선보일 자체 음식 주문 플랫폼 ‘땡겨요’의 신용평가모형을 강화하기로 했다.
인터넷전문은행들도 앞서 당국에 제출한 올해 대출 목표치를 맞추기 위해 중저신용자 대출 늘리기에 혈안이다. 카카오뱅크는 중·저신용 대출 비중을 지난 8월 말 12.3%, 9월 말 13.4%, 10월 말 14.6%로 차츰 늘려가고 있다. 지난 9월 말 기준 중저신용대출 잔액은 1조9701억원 규모다. 케이뱅크의 올해 1~10월 중저신용 고객 신용대출 규모는 465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208억원) 보다 2배 이상 늘어났다.
이처럼 중·저신용자 대출의 숨통은 어느 정도 트일 것으로 보이는 반면, 고신용자들에겐 내년에도 대출 한파가 지속될 전망이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내년 가계대출 총량 규제액에 맞추면서도 서민 실수요자들에 대한 자금 공급을 지속하려면, 고신용자들에 대한 대출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 일부 은행들은 이미 고신용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마이너스통장 등의 대출을 축소 또는 중단한 상황이다.
케이뱅크와 카카오뱅크는 연말까지 일부 고신용자 대출을 중단한 상태다. 케이뱅크는 지난달부터 마이너스통장 대출상품 고신용 고객 대상 신규·증액 신청을 중단했다. 올크레딧(KCB) 820점이 넘는 고객이 해당된다. 카카오뱅크도 지난 10월 고신용 신용대출, 직장인 사잇돌대출 신규를 연말까지 중단한 바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신용대출을 포함한 은행권 기타대출은 지난달 5000억원 늘어나는데 그쳐 전년동기(7조4000억원) 보다 93% 급감했다. 올 1~11월 기타대출 증가액도 16조9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2조원) 보다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일각에서는 그간 신용도를 잘 관리해온 고신용자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시장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대출 규제가 부실 가능성이 높은 이들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거꾸로 고신용자들을 집중 타깃으로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며 “과연 건전성 차원에서 규제의 방향성이 맞는 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고신용자 대출이 주로 부동산, 주식시장 투자로 흘러가는 등 건전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며 “이러한 가정 자체를 개선하고, 정부는 인위적으로 규제할 것이 아니라 시장 상황에 맞게, 리스크 관리를 보다 전문적으로 하는 금융사들에 맡겨둘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