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적 투자자(FI) 어피니티컨소시엄이 조만간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을 상대로 다시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재판소에 중재 절차를 신청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9일 파악됐다. 2012년 신 회장과 풋옵션(지분을 미리 정한 가격에 되팔 수 있는 권리)이 포함된 주주 간 계약을 맺은 어피니티가 국제중재 절차에서 승소 판정을 받으면 신 회장 측은 최대 2조 원이 넘는 교보생명 주식을 어피니티로부터 매수해야 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10년 전 ‘백기사’로 투입해 지분 매수
어피니티가 다시 ICC 국제중재재판소에서 후속 중재 절차를 밟게 된 계기는 지난해 12월 27일 서울북부지법이 어피니티가 신 회장을 상대로 “주식 가격 결정에 관한 보고서를 제공하라”며 낸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기 때문이다. 서울북부지법은 “2012년 신 회장과 어피니티가 맺은 계약에 대해 국제중재재판소는 어피니티가 계약 이행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지는 않았고, 신 회장은 평가기관 선임 의무를 위반했다”면서도 “국제중재 판정이 내려지기 전에 가처분을 발령하지 않더라도 어피니티가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을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해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어피니티가 신 회장을 상대로 계약 이행을 청구할 권리는 있지만 한국 법원에서 가처분을 발령해 해결할 급박한 문제는 아니고 국제중재 절차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란 취지다.
양측의 분쟁은 2012년 대우인터내셔널이 교보생명 지분 24%를 매각하려고 할 때 신 회장이 어피니티 측을 ‘백기사’로 투입하며 시작됐다. 당시 어피니티는 1조2000억 원을 투자해 대우인터내셔널 지분(24%)을 주당 24만5000원에 인수하며 신 회장과 풋옵션이 포함된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어피니티가 매수한 주식은 액면가 5000원의 보통주 492만 주였다.
어피니티 측은 교보생명 기업공개(IPO)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할 목적이었다. 이때 IPO가 시행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만든 계약상 조항이 풋옵션이었다. IPO가 없더라도 미리 정한 가격에 교보생명 지분(24%)을 신 회장에게 되팔아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9월 17일 양측은 “2015년 9월 30일까지 교보생명의 기업공개가 완료되지 않은 경우 어피니티가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의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풋옵션을 행사할 경우 공정시장가격(FMV)을 결정해 신 회장이 해당 가격으로 어피니티 측이 보유한 교보생명 지분을 매수해야 한다. 이에 대해 주주 간 계약에는 “양측은 회계법인 등 평가기관을 선임해야 하고, 어피니티가 풋옵션을 행사하겠다고 통지한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두 평가기관은 공정시장가격 결정에 관한 서면 보고서를 양측에 제공해야 한다(주주 간 계약 제7.3조)”는 내용이 포함됐다.
국제중재재판소 “신 회장이 평가기관 선정 의무 위반”
2019년 처음 시작된 국제중재 절차는 2015년부터 예고된 절차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울북부지법은 지난해 12월 27일 낸 결정문에서 “신 회장 측은 IPO를 완료하기로 약속한 2015년 9월 30일로부터 3년이 지난 2018년 10월까지도 IPO를 완료하지 않았다”며 “이에 어피니티 측은 2018년 10월 23일 주주 간 계약 제7조에 따라 풋옵션을 행사하겠다고 서면 통지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북부지법은 신 회장이 2012년 주주 간 계약에 명시된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결정문에 따르면 어피니티는 주주 간 계약 제7.3조에 따라 2018년 9월 안진회계법인을 공정시장가격 평가기관으로 선임한 뒤 같은 해 11월 22일 신 회장 측에 안진회계법인이 작성한 공정시장가격 평가보고서를 제공했다. 해당 보고서에는 신 회장 측이 어피티니가 보유한 교보생명 주식 492만 주를 주당 40만9912원에 매수해야 한다고 적혔다. 재판부는 “신 회장 측은 풋옵션을 행사하겠다고 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30일이 넘도록 주주 간 계약에서 정한 공정시장가격 평가기관을 선임하지 않고 평가보고서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에 어피니티는 국제중재 절차에 나섰다. 어피니티는 2019년 3월 20일 ICC 국제중재재판소에 “어피니티가 선임한 회계법인에 의해 산정된 공정시장가격에 따라 주주 간 계약이 성립했으므로 신 회장은 어피니티에게 주식 매매대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며 국제중재를 신청했다.
이후 국제중재재판소는 지난해 9월 1일 “주주 간 계약 제7.3.조에 따라 유효한 공정시장가격이나 풋가격(풋옵션을 행사할 때 적용되는 가격)이 산정되지 않았으므로 신 회장은 어피니티의 교보생명 주식을 매수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했다. 재판소에서 신 회장이 어피니티가 보유한 교보생명 주식을 매수할 의무가 없다고 판단한 이유는 사전 절차가 완료되지 않아서였다. 판정문에 따르면 재판소는 신 회장이 평가기관을 선임하지 않아서 어피니티가 선임한 평기기관이 산정한 공정시장가격만으로는 최종 풋가격을 결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주주 간 계약에는 양측이 평가기관을 선임해야 한다고만 돼 있고 이 계약을 위반했을 경우에 대한 규정은 없다. 따라서 양측 평가기관이 공정시장가격을 함께 산정해야만 풋옵션이 행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재판소는 “신 회장은 주주 간 계약 제7.3.조에 따라 공정시장가격을 결정할 평가기관을 선임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아 이 의무를 명백하게 위반했다”며 “이 의무 위반이 분쟁의 근원이 됐다”고 판단했다. 이어 재판소는 “어피니티는 주주 간 계약에 따라 2018년 유효하게 풋옵션을 행사했다”고 덧붙였다. 또 신 회장이 어피니티 측에 국제중재 절차에 든 법률 비용 3억2775만 원과 1466만 달러 등을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중재비용과 관련해 109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판정도 추가됐다.
국제중재 판정 이후 어피니티는 “채무자인 신 회장이 교보생명 주식 공정시장가격 결정에 관한 서면 보고서를 채권자인 어피니티에 제공하는 절차(평가기관 선임 등)를 이행하게 해달라”며 서울북부지법에 가처분 신청을 냈다. 서울북부지법은 신 회장에게 평가기관을 선임할 의무 등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국제중재 절차를 해결할 분쟁이라는 취지로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가처분은 채무자가 긴급히 특정 처분을 내리거나 행위를 하도록 해서 채권자가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는 것을 막는 민사상 결정이다. 본안 판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법원이 임시로 내리는 긴급 처분의 성격을 가진다. 서울북부지법은 국제중재재판소와 마찬가지로 “신 회장이 평가기관을 선임하지 않은 것은 2012년 체결된 주주 간 계약 제7.3조를 위반한 것”이라며 “신 회장은 평가기관 선임 등 절차를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의무 이행하라” 요구에 신 회장 “의사 없다”
한국 법원 결정 이후 양측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어피니티 측은 지난해 12월 29일 신 회장에게 풋옵션 계약에 따라 공정시장가격 결정을 위한 평가기관 선임 등 의무를 이행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서울북부지법이 신 회장에게 평가기관 선임 의무 등이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어피니티 측은 “법원 결정으로 풋옵션 행사가 유효하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주장하며 이달 3일까지 입장을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신 회장 측은 이달 3일 어피니티 측에 의무를 이행할 의사가 없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신 회장 측은 “(평가기관 선임 등) 답변을 요구한 사항에 대해 계약상 의무를 인정할 수 없고 앞으로도 이를 이행할 의사가 없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피니티 측은 “법원 결정의 취지에 따라 조만간 국제중재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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