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됐던 세계 최대 가전·IT(정보통신) 전시회 CES2022가 끝난 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갑니다. 워낙 많은 기업들이 다양한 기술을 들고 나타났던 만큼, 폐막 이후에도 관련된 이야기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전기차 플랫폼 경쟁, 그리고 바퀴와 자율주행 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모빌리티 관련 회사가 몰려있던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 웨스트 홀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부품업체 현대모비스의 전시관이 있었습니다. 현대모비스는 ‘e-코너 모듈’을 앞세워 CES를 찾았죠.
‘e-코너 모듈’은 바퀴가 90도까지 꺾일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 모듈이 장착된 차량은 평행주차에서 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운전면허를 가진 분들은 동의하실텐데, 후면주차보다 어려운 게 평행주차인데요. 크랩주행(바퀴를 90도로 완전히 꺾어 전후가 아닌 좌우로 진행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앞뒤로 움직이는 걸 반복할 필요 없이 한 번에 주차를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적잖은 관람객들이 ‘e-코너 모듈’이 장착된 도심형 콘셉트카 ‘엠비전 팝’을 살펴보고, ‘엠비전 투고’의 시연을 흥미롭게 바라봤습니다.
현대모비스가 ‘e-코너 모듈’을 개발한 배경은 뭘까요.
현대모비스는 목적 기반 모빌리티(PBV) 구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라고 설명합니다. PBV란 용도나 목적에 따라 외형이나 기능이 변하는 차량을 의미합니다. PBV를 만들기 위해서는 ‘플랫폼(자동차의 뼈대)’과 ‘자율주행’이 핵심 요소로 꼽히죠.
‘e-코너 모듈’은 현대모비스가 전기차 플랫폼을 만들기 위해 개발한 제품이라고 봐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현대모비스는 1조 원 수준인 연구개발(R&D) 투자액을 2025년 1조7000억원까지 확대하기로 발표하면서 자율주행, 전동화, 커넥티비티(연결성)를 핵심 역량으로 짚었는데, 이들은 모두 플랫폼과 연결된 기술입니다. CES 현장에서 현대모비스 R&D를 담당하는 천재승 상무는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저속 도심 주행이라는 목적에 맞는 PBV 개발이 목적이고, (승용차와 같은) 다이나믹한 주행에는 큰 의지를 두지 않고 있다. 5년 정도 후에 실제 차 형태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현대모비스 전시관 근처에는 ‘리(REE)’라는 이스라엘 자동차 부품업체의 전시관이 있었습니다. 2011년에 설립됐고 미국 나스닥시장에 상장된 회사죠. 이 회사는 P7이라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전시했습니다.
눈길을 끄는 건 이 제품의 구조였습니다. 통상 자동차에는 두 개의 앞바퀴 사이에 엔진이나 모터에서 발생한 에너지를 전달해주는 차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품은 바퀴 사이에 차축 같은 동력장치는 없고, 오로지 배터리만 있었습니다. 4개의 바퀴가 있지만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였습니다. 현대모비스의 엠비전 팝, 엠비전 투고 콘셉트와도 비슷한 구조이면서 크기는 훨씬 컸습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일본 도요타의 상용차 브랜드 ‘히노’와 합작해, 2023년에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형태의 전기차 플랫폼, 즉 4개의 바퀴가 개별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를 개발하려는 구상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인휠모터, 즉 휠 안에 구동 장치(모터)를 넣으려는 아이디어는 예전부터 있었다. 다만 기술적인 난관 때문에 적용을 못했는데, 최근 들어 많이 개선되면서 여러 업체들이 개발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독일 자동차 부품사 ZF(체트에프) 같은 곳도 개발에 나서기도 했고, 유튜브 등에서도 인휠모터를 활용한 콘셉트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휠모터가 적용된 전기차 플랫폼의 장점은 배터리 탑재량을 늘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의 경우 앞바퀴 사이나 뒷바퀴 사이에는 동력전달장치가 있죠. 이 때문에 배터리는 휠베이스(축거·앞뒤 바퀴 축 사이 거리)에만 탑재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배터리 용량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죠. 천재승 상무도 “이 플랫폼의 가장 장점 중 하나는 배터리 탑재량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인휠모터 시스템이 양산되려면 대량 생산 체제가 구축되어야 하고, 내구성을 보강하는 것은 물론 고장났을 경우 이를 쉽게 교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등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CES를 통해 인휠모터가 들어간 자동차 플랫폼이 상용화될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타트업, 부품사, 완성차 업체들이 인휠모터를 탑재하는 등 한 단계 더 발전한 플랫폼 개발에 몰두하는 건 미래 모빌리티를 좌우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특정 회사의 전기차 플랫폼이 많이 채택될수록, 이 회사의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 지배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빌리티 분야 전문가들은 자율주행, 통합 관제의 관점에서 봤을 때 동일한 플랫폼을 가진 차량들이 많을수록 유리하다고 합니다. 자동차의 운행 조건, 통신 신호 등이 규격화된다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도로의 모든 차량이 외형은 다르더라도 모두가 테슬라가 만든 자동차 플랫폼을 채택했다고 가정해보죠. 테슬라가 설계한 차량들끼리는 동일한 통신 모듈을 장착할 테니, 차량 간 통신이 더욱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이는 자율주행 상태에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을 낮춰줄 겁니다. 또한 테슬라의 교통 통제 시스템이 채택된 도로라면, 중앙 제어 센터에서 모든 차량을 한꺼번에 컨트롤할 수도 있습니다. 교차로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면, 중앙 제어 센터에서 이쪽에 진입하는 차량 전부를 한꺼번에 정지시키거나 우회로로 유도할 수 있다는 뜻이죠. 반면 현재처럼 자동차 제조사마다 각자 개발한 플랫폼을 쓰고 있다면 이 같은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더욱 어려워질 겁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회사 중에는 글로벌 자동차부품사 보쉬, 콘티넨탈 등도 있습니다. 두 회사 모두 이번 CES에서 커넥티드카, 즉 차량이 소프트웨어처럼 기능해 외부와 통신을 주고받아 소통하는 시스템을 새로운 먹거리로 제시했습니다. 콘티넨탈은 차량을 클라우드 컴퓨팅과 연결하는 체계를 제시했고, 보쉬 역시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한 커넥티드카를 소개하며 관련 소프트웨어와 클라우드를 판매하겠다고 했는데요. 두 회사 역시 자체 개발한 전기차 플랫폼의 활용 방안을 찾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대자동차는 어떨까요.
현대차가 개발한 전기차 플랫폼 E-GMP는 분명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 아이오닉5를 비롯해 기아 EV6, 제네시즈 GV60 등에 활용되고 있죠. 앞으로 현대차그룹이 선보일 다양한 전기차에도 활용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PBV를 구현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연기관을 대체할 플랫폼으로 개발하다보니, 운동 성능 등 기계적인 면이 강조됐다는 겁니다. CES가 끝난 뒤인 11일 장재훈 현대차 사장이 제네시스 G90을 소개한 자리에서 “E-GMP와는 별도로 새로운 플랫폼을 검토 중이다”이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비록 고급 세단에 필요한 플랫폼을 언급한 것이기는 하지만 현대차 역시 새로운 전기차 플랫폼을 확보해 시장 경쟁력을 키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음 CES에도 새로운 전기차 플랫폼들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어떤 회사의 플랫폼이 주요하게 채택될지, 또 어떤 회사들이 동맹을 맺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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