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현장 ‘신발 속 돌멩이’ 규제<상> 발목 잡힌 기업경쟁력
탄력근로 하려면 노조 합의 필수…규제 덜한 해외기업 유리한 조건
혈압측정 기능 담은 스마트워치…원격의료 금지에 한국선 활용 못해
“새 시장 창출하려면 규제완화 시급”
동남아시아에서 건설사업을 수주한 A사. 현지에서 채용한 근로자들은 주 72시간 근무가 가능한 베트남인이다. 본사에서 파견한 한국인 관리자는 ‘주 52시간 근무’를 적용받는다. 한국인들이 근무시간을 채우면 그 주에는 더 이상 공사를 할 수 없다. 관리자 없이 공사를 진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기(雨期)를 피해 몰아서 공사하는 것도 힘들다.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일하고 한가할 때 쉬도록 탄력근로시간제를 적용하려면 노동조합 서면합의를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너무 까다롭다. 결국 인력을 추가로 투입하게 돼 공사금액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중국 등 해외 기업은 라마단, 열대 고온 기간 등을 고려한 유연근로가 가능해 국내 기업들에 비해 수주 경쟁에서 훨씬 유리한 조건이다.
23일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국내 경제단체들이 본보에 알려온 ‘신발 속 돌멩이’의 대표적 사례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21일 경제 6단체장과 만난 뒤 “신발 속 돌멩이 같은 불필요 규제들을 빼내 기업들이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힘껏 달릴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썼다. 전경련 관계자는 “규제에 발목이 잡혀 기업 경쟁력이 약화된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며 “회원사들로부터 현장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수집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의 투자 대상을 벤처·중소기업으로 제한한 것도 글로벌 스탠더드와는 동떨어진 규제다.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인텔 등 미국의 대표 테크기업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 업체들도 CVC를 통해 해외 기술기업에 직접 투자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직접 인수합병(M&A)해 덩치를 키우거나 지분 투자 형태로 기술을 공유한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CVC는 벤처나 중소기업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전체 생태계를 키우자는 목적인데 해외에선 보기 힘든 조건을 두고 있어 안타깝다”고 전했다.
경총은 노사제도 관련 일부 법령을 ‘빨리 빼내야 할 돌멩이’로 꼽고 있다. 특히 주요국에서 찾기 힘든 ‘부당 노동행위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이 언급됐다. 사용자만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다. 미국은 사용자뿐만 아니라 ‘교섭 거부’ ‘타 근로자의 권리행사 제한’ 등 노조의 부당 노동행위도 제재한다. 반면 한국에선 노조가 파업을 하는 동안 비노조원의 출근을 물리적으로 막거나 명단을 공개하더라도 제재할 수단이 없다. 또 파업 시 대체근로가 전면 금지돼 있어 업무 공백을 메울 수 없다는 점도 미국, 독일 등과는 다르다. 이로 인해 노조가 대화보다 과격한 투쟁을 쉽게 선택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래 유망산업으로 꼽히는 헬스케어 영역에서는 각종 규제로 대기업들이 제대로 날개를 펴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2020년 웨어러블 기기 ‘갤럭시 워치3’에 탑재한 혈압측정 기능은 원격의료가 금지된 한국에서는 부가가치를 전혀 만들지 못한다. 미국에서 의료진이 갤럭시 워치로 측정한 혈압을 활용해 진료, 처방을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LG전자의 ‘전자식 마스크’는 해외 40개국에 판매되는 동안 한국에서는 출시되지도 못했다. 제품명에 ‘마스크’를 사용하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의약외품’ 허가를 받아야 해서다. LG전자는 6개월이 넘도록 승인을 받지 못하다 자진 철회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상황에서 한국 소비자들은 LG의 전자식 마스크를 홍콩, 대만, 태국 등에서 추가 배송료를 부담하고 구입해야 했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신규 사업과 관련한 국내 규제는 단순히 한국 시장에서의 매출 포기를 넘어 ‘홈그라운드’ 없이 원정경기만 뛰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스타트업을 위해서라도 파격적인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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