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공사장에서 협력업체 직원이 사망한 A건설사. 현장 안전담당관리자 김모 씨(45)는 최근 한 달 새 경찰과 광역 노동청, 광역청 산하 지청을 분주히 오가며 6차례 조사를 받았다. 경찰에서는 형법상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수사받았고 광역 노동청과 광역청 산하 지청에선 각각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조사받았다. 1개 사건으로 3곳에서 따로 조사를 벌이며 출석 통보가 잦아졌다. 그는 “부를 때마다 현장을 비워야 하는데 그 사이 또 다른 사고가 날까 봐 신경이 곤두서 있다”고 했다.
이달 27일 시행 3개월을 맞이한 중대재해법이 기업에 각종 행정 부담 등을 지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대재해법은 올해 1월 27일 사망사고 등 중대재해 발생 시 사업주나 최고경영자(CEO)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사고를 막겠다는 취지로 시행됐지만 이 기간 사망 사고는 오히려 늘어 기업에 ‘신발 속 돌멩이’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동아일보가 25일 대한건설협회와 공동으로 전국 건설사 183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 건설사의 96.7%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경영활동에 부담이 된다’고 답했다. 실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이달 25일까지 접수된 사망 사고는 총 154건으로 전년 동기(112개)보다 37.5% 늘었다.
[1] 건설사들 “중대재해법 안전관리 서류 1.5배 늘어 매일 야근”
97% “경영활동에 부담”
[2] “대기업서 안전 인력 싹쓸이”, 중소-중견사들 인력 모자라 [3] 발주처 안전관리 비용도 적어… 원자재난 겹쳐 비용 부담 가중
경기도에 있는 3000채 규모의 아파트 건설 현장. 본사 소속 안전관리자 이모 씨(45)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1월부터 매일 1∼2시간씩 야근한다. 그의 업무 대부분은 현장을 일일이 방문해 사진 찍고 서류로 남기는 작업이다.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해 처벌받을 경우에 대비해 본사가 사다리 관리, 추락 방호망 설치, 안전고리 설치 등 안전보건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사전 조치다. 그는 “현장을 둘러보고 직원을 교육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써야 하는데 일단은 사진 찍기에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고 했다.
○ “서류 작업만 1.5배 늘어…안전 인력 태부족”
동아일보와 대한건설협회가 공동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건설사들은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 △과다한 행정 업무 증가 △안전 인력 채용난 △안전 관련 비용 급증 등 ‘3중고’에 시달린다고 강조했다.
한 중견 건설사 안전담당 임원은 “안전 조치 관련 서류량이 법 시행 이전보다 1.5배로 불어났다”며 “매일 야근과 회의를 반복해 직원들이 지쳐 있다”고 했다. 중소·중견 건설사들은 안전보건 전문 인력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한 지방 중소 건설사 관계자는 “대기업에서 안전 인력을 싹쓸이해 갔다. 공급이 적어지니 이들 월급도 계속 오르는 추세”라고 했다. 설문에서도 중대재해법이 부담으로 작용하는 이유로 응답사의 28.4%가 안전보건관리 전문 인력 채용이 힘든 점을 들었다.
매출액 3000억 원 규모의 골조 공사 전문 B건설사는 안전관리자 5명을 뽑으려고 채용공고를 냈지만 지원자가 단 1명도 없었다. 안전담당 임원 천모 씨(60)는 “대학교 안전 관련 학과 졸업반 학생 3명을 실습생으로 채용했지만 일주일도 안 돼 사직서를 냈다”고 했다.
안전관리자 구인난은 더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안전관리자 의무 배치 공사비 기준이 올해 80억 원에서 2023년 60억 원, 2024년 50억 원으로 낮아져 안전관리자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다른 중견 건설사 안전담당 임원은 “전체 현장의 70%가 지방에 몰려 있는데 직원들이 지방 근무를 꺼려 인력 구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 “안전 비용 부족…근로자 안전의식 높여야”
발주처가 책정하는 안전관리 비용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조사에서 ‘공사비 중 안전관리 비용이 실제 소요되는 비용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냐’는 질문에 81.4%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철근·콘크리트 업체 자재담당 임원은 “100억 원 공사면 안전관리 비용이 1억 원밖에 안 된다”며 “최근 원자재난으로 자재값도 크게 올라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건설사들의 안전 체계 미비로 사고가 나는 인재(人災)도 있지만, 처벌 위주의 현행 규정만으로는 사고를 실질적으로 예방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응답사의 56.8%는 ‘과도한 처벌 규정 완화가 시급하다’고 답했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기업 스스로 안전보건 규제를 지킬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고 했다.
현장 근로자들의 안전의식을 키우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건설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가장 주된 원인을 묻는 질문에는 88.5%가 ‘현장의 지침 미준수’라고 답했다. 두성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집중적인 안전교육이 필요한데, 처벌 위주의 현행 법규는 사고 책임 회피에만 급급하게 만든다”며 “역량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교육 지원 등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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