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벗는데 나는 더 우울”… 엔데믹 블루 경고등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3일 03시 00분


[더 나은 일상, 베터 노멀]〈1〉‘엔데믹 블루’ 경고등
본보-틸리언프로 1268명 설문… 10명중 6명 “최근 더 우울해져”

《최근 2년여간 코로나19를 겪으며 일상에서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습니다. 동아일보는 라이프스타일 영역에서 독자들의 ‘더 나은 일상(베터 노멀·Better Normal)’을 돕는 콘텐츠인 ‘베터 노멀’을 연재합니다.》


서울 종로구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서모 씨는 안 팔려서 결국 시들어버린 꽃을 보면 자신의 모습 같아 우울해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된 2년여간 매출이 ‘반의 반 토막’ 나도 버텨 왔는데 최근 거리 두기 해제 이후 별반 나아진 게 없어서다. 그는 “거리로 나오는 사람은 늘었는데 아무래도 나만 가망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 등 코로나19로부터의 일상 회복이 가까워졌지만 한국인의 정신건강에는 ‘엔데믹 블루’의 경고등이 켜진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의 풍토병(엔데믹) 전환을 앞두고 우울감이 깊어지는 사람이 적지 않은 데에 따른 것이다.

동아일보가 2일 SM C&C 설문 플랫폼 ‘틸리언 프로’와 공동으로 10∼60대 남녀 1268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79%는 최근 우울감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응답자의 61%는 코로나19 확산 초기보다 최근 우울감이 더 심해졌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비대면 활동을 줄이고 진짜 연결성을 찾는 방식으로 후유증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만 불행” 일상회복에도 우울… 비대면 줄이고 ‘진짜 연결’ 찾아야

‘재난은 다 힘든 거야’ 함께 버티다 상황 끝나면 남들과 격차 더 느껴
재난 직후보다 시간 흐른 뒤 ‘폭발’… 일상회복 앞두고도 무기력 깊어져
과거 어려움-미래 걱정에 거리 두고, ‘지금, 여기’에 집중 자존감 회복해야
익숙해진 ‘랜선’ 의도적 탈피 필요… 코로나前 루틴 회복하는 것도 방법


취업준비생 홍모 씨(29)는 요즘 예쁜 봄옷을 봐도 감흥이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전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을 옷을 쇼핑하느라 하루 3∼4시간 발품 팔던 때가 상상조차 안 간다. 최근엔 6년 넘게 공들여 관리했던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까지 ‘폭파’시켰다. 그는 “코로나19로 채용 문이 닫히며 서류전형 탈락까지 숱하게 겪었다”며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이 자꾸 생겨서 SNS 계정을 없앴다”고 했다.

실외 노 마스크 첫날… 시민들 “아직은 불안” 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행인들 사이에 한 
시민이 마스크를 벗어 손에 든 채 길을 건너고 있다. 방역당국은 2020년 10월 13일부터 시행한 실외 마스크 의무 착용 조치를
 566일 만인 이날부터 해제했다. 그러나 거리에 나선 시민 상당수는 여전히 실외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한 모습이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실외 노 마스크 첫날… 시민들 “아직은 불안” 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행인들 사이에 한 시민이 마스크를 벗어 손에 든 채 길을 건너고 있다. 방역당국은 2020년 10월 13일부터 시행한 실외 마스크 의무 착용 조치를 566일 만인 이날부터 해제했다. 그러나 거리에 나선 시민 상당수는 여전히 실외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한 모습이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일상 회복에 시동이 걸리고 완연한 봄날에 접어들면서 거리마다 인파로 북적인다. 하지만 한국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위험 신호가 켜지고 있다. 코로나19가 엔데믹(풍토병)으로 전환되면서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재난 상황 이후 갑자기 덮쳐오는 우울감, 이른바 ‘엔데믹 블루’ 때문이다. 외부 환경이 활기차고 분주해질수록 역설적으로 마음이 더 병드는 사람이 적지 않다.
○ 재난 상황 끝난 뒤 치솟는 우울증

2일 동아일보와 SM C&C ‘틸리언 프로’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방역조치가 엄격했던 코로나19 확산 초기(23%)보다 거리 두기 해제를 앞둔 후기(61%)가 더 우울하다고 답한 이들이 훨씬 많았다. 코로나19 이후 삶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지 않을 거란 비관도 절반 이상(57%)이나 됐다.

돈가스 가게를 운영하는 권모 씨(52)는 2층 매장에서 거리를 내려다볼 때마다 허탈하다. 코로나19 기간 배달 주문 덕에 오히려 매출 타격은 작았지만 최근 매장 손님이 크게 늘진 않았다. 행인들은 더 많아지는 것 같은데 유독 자신만 일손 놓고 TV 볼 때가 많아진 것 같았다. 그는 “상권이 다시 활성화되면 건물주가 월세를 올릴 텐데 벌써 걱정”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엔데믹 블루의 가장 큰 원인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꼽는다. 재난 상황에서는 다 같이 힘들다는 생각으로 버텼는데, 정작 경제가 회복 기미를 보이고 여행과 모임이 재개되면서 ‘나만 여전히 불행하다’는 생각에 우울감이 심해지는 것이다.

정보기술(IT) 기업에 다니는 강모 씨(35)는 최근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집에서 혼자 밥을 먹다가도, 골프 연습을 하다가도 이유 없이 무력감이 찾아오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다. 그는 “코로나19로 경제적 타격을 입지도, 건강상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는데 언제든 코로나19 때처럼 막막한 상황이 재발할 것만 같아 암담하다”고 했다.


이번 설문에서도 코로나19 이후의 전망이 어두웠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처지를 비교했을 때 ‘나의 미래가 다른 이들보다 나을 것’이라고 답한 비중 역시 18%에 불과했다.
○ 일상 회복 앞두고도 깊어지는 무기력
이 같은 엔데믹 블루 양상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패턴과도 흡사하다.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2011년 3월 발생한 이 사고 이후 ‘대피명령구역’ 거주 주민들의 자살률은 1년 6개월간 감소세를 나타내며 피해가 적었던 지역보다 오히려 낮았다.

문제는 2년여가 지난 뒤에야 이 지역 자살률이 치솟았다는 점이다. 사고 직후 인구 10만 명당 47.8명(남성)이었던 자살자가 한때 23.1명까지로 떨어졌지만 사고 2년 2개월 만인 2013년 5월부터 늘더니 2015년 7월 37.6명으로 올라섰다. 마사쓰구 오루이 후쿠시마 의과대학 연구원은 “개인적으로나 범국가적으로나 심리건강관리(mental care activity)가 줄어든 게 주원인”이라고 했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우울, 불안이 늘었음에도 극단적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던 건 ‘같이 이겨내자’란 생각이 보호요인이 됐기 때문”이라며 “동일본 대지진, 외환위기, 미국발 금융위기 등 과거 국가적 재난이 발생했을 때마다 재난 직후보다는 시간이 흐른 뒤 더 큰 위기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경제·사회 여건에 따라 일상 회복 격차가 생기는 최근 상대적 박탈감이 더 커지는 이유다.
○ 부정적 감정에 거리 두고 주변에 마음 베풀기

엔데믹 블루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분석 전문가들은 어려움을 털어놓고 공감 받을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극단적 우울감은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설문에서 그런 사람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답한 비중이 77%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우선 자신에게도 다정한 사람이 되고 타인에게도 다정한 사람이 될 것을 당부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 확산 직후에 발간한 ‘역경 극복을 위한 스트레스 관리 가이드라인‘을 통해 친절, 용기, 베풂 등 중요한 가치를 정하고 이를 주변 사람들에게 실천해보는 방법도 제안한다. 거울 자아 이론(Looking Glass Self·기대하는 대로 자아가 형성된다는 이론)을 자신과 상대방에게 적극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타인이 내가 다정한 사람임을 기대하는 것처럼 나 또한 타인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어 내가 중요시하는 가치를 먼저 베풀고 행동하라는 뜻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자존감부터 회복해야 한다. 그 첫 단추는 ‘지금-여기(now&here)’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WHO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두 발을 땅에 붙이고 깊이 호흡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으로 시작된다. 미지근한 물을 조금씩 천천히 마시며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감각에 집중한다. 음식을 먹을 땐 음식의 향, 질감, 색깔을 고루 느끼며 내 일상에 스스로 다정해져야 한다. 내 아픔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하나씩 명명해본 뒤 차분하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도 좋다.

이처럼 자신의 몸에 집중하는 마음챙김(mindfulness)을 통해 과거의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심리적인 거리 두기(displacement)를 해야 한다. 당장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과거나 미래는 떨쳐내고 ‘지금-여기’만 우선 생각하는 훈련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명상처럼 지금 내가 느끼는 감각 외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라며 “내 감각에 확신을 가짐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비대면 활동 줄이며 사람들과 ‘진짜 연결’돼야
마음챙김을 위해서는 화상회의, 온라인 쇼핑, 넷플릭스 시청 등으로 익숙해진 비대면에서 의도적으로 멀어지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규칙적으로 산책과 운동을 하고, 온라인 쇼핑이나 재택근무만 하는 대신 일부러라도 짧게나마 외출과 모임을 하는 것이 좋다.

이번 설문에서 10, 20대의 경우 코로나 후반기로 갈수록 우울증 체감 정도가 전 연령대 중 가장 큰 폭으로 낮아졌다. 임명호 교수는 “대면수업 재개로 다시 타이트해진 일상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며 “‘집콕’으로 흐려진 일상 속 경계를 규칙적인 시간표로 바로잡는 것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 회복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현수 서울시 코비드19 심리지원단장(명지병원 신경정신의학과 교수)은 “대부분 활동이 온라인으로도 가능해진 초연결 사회지만 코로나19를 통해 알게 된 건 ‘온라인으로 연결돼선 진짜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라며 “랜선 활동이 심심하고 무료한 기분을 잠시 채워줄 순 있어도 우울감과 고립감을 해소하진 못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전 하루를 재구성해 적용해보고 그때의 루틴(routine)을 조금씩 회복해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오만 가지 색색의 고운 꽃들이 자기가 제일인 양 활짝들 피었”다고 노래한 이해인 수녀의 시처럼,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일상도 실은 오만 가지 색으로 피어난 고운 꽃이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마스크#노마스크#우울#엔데믹 블루#상대적 박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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