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가전전시회(CES)에서 청바지와 후드티 차림으로 내내 부스를 지키며 열띠게 설명하는 ‘시니어’ 창업가가 있었다. 디지털치료제 스타트업 ‘히포티앤씨’ 대표인 정태명 성균관대 소프트웨어학과 교수(64)였다. 디지털 제품으로 치료 효과를 내는 기술을 개발하는 이 회사는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헬스/웰니스 분야에서 두 개의 혁신상을 받았다.
국내 정보보호 학계의 대가로 내년에 교수 정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스타트업은 청년만 해야 하나’란 질문을 품고 2020년 4월 스타트업을 차렸다. “은퇴하면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을 쓸 데가 없다. 그동안의 노하우와 경험을 살려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
○ 디지털 게임으로 ‘마음의 병’ 치료
최근 경기 수원시 성균관대 산학협력관에 자리 잡은 히포티앤씨를 찾아가자 정 대표는 VR 기기를 써보라고 건넸다. 눈앞에 책상과 문방구 이미지가 펼쳐졌다. 가상현실에서 가방 안에 가위와 펜 등을 집어넣도록 음성 안내가 나왔다. 이 일을 얼마나 정교하고 빠르게 해내는지를 18개 척도로 측정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진단한다. 그는 “국내 ADHD 환자가 150만 명이 넘는데 병원에서는 대부분 약물치료를 권한다”며 “게임으로 행동 치료를 하면 부작용도 없고 언제 어디서나 치료할 수 있어 의료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디지털치료제는 아직 생소하다.
“세계 최초의 디지털치료제는 미국 페어테라퓨틱스사(社)의 마약류 중독치료 앱인 ‘리셋’으로 2017년 미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받았다. FDA 허가를 받은 디지털치료제가 아직 20여 개에 불과하다. 최근엔 미국 아킬리사가 만든 ADHD 치료용 게임이 최초로 판매 승인을 받았다. 한국은 이제야 식약처 품목 허가를 받기 위한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막 태동한 시장이다.”
―왜 이 시장에 뛰어들었나.
“알고 지내던 의사가 함께 운동을 하다가 디지털치료제 얘기를 하기에 창업하기 전에 1년여 공부해봤다. 나의 정보기술(IT) 경험을 총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정보보호 분야에서 숱하게 사업 제의를 받아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디지털치료사업은 직접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2025년에 시장 규모가 10조 원이 넘는다는 전망을 접하고 더욱 도전의식이 들었다.”
―디지털치료제의 효능은….
“ADHD뿐 아니라 코로나를 거치며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늘고 있어 심각한 사회 문제다. 마음에 병이 들면 만사가 귀찮아져 움직이지 않게 된다. 명상 산책 심호흡 운동 소통만 해도 우울감을 크게 낮출 수 있다.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수집된 데이터를 인공지능(AI) 모델로 분석해 개인별 맞춤형 치료를 제공한다.”
○ “경력을 살려 미리 창업을 준비하라”
인터뷰 사진을 촬영할 때, 정 대표는 회사 직원들과 함께 찍어도 되겠느냐고 했다. “스타트업은 대표 혼자 잘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며 “경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전략을 짜고, 젊은 사람들이 실행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히포티앤씨의 인적 구성은 신구(新舊)가 조화를 이룬다. 최연소 직원이 스무 살인데 비해 김문현 개발실장은 성균관대 정보통신대학원장을 지내고 은퇴한 AI 전문가다. 의학 자문은 삼성서울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 의료진, 경영 자문은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신경공학 박사 출신인 윤송이 엔씨소프트 사장 등이 포진해 있다. ―‘인맥 부자’라서 가능한 직원 구성 같다.
“그동안 일하면서 만났던 인연들이다. 오래 전부터 알아온 윤 사장이 히포티앤씨의 미국 진출을 알아봐주고 있다. 보이지 않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떻게 사회에 되갚을지 고민이다.”
―시니어 전문가들은 풀타임 직원인가.
“은퇴한 전문가들은 급여를 덜 받고 주 2, 3회만 일해도 인생의 보람을 느낀다.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여성들의 경력을 단절시키면 안 된다. 일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기업도 정부도 도와야 한다.”
―창업이 두려운 50, 60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사실 많은 시니어들이 창업을 한다. 통닭 가게도 창업이지 않나. 자신의 경력을 살려 할 수 있는 일을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 산에 올랐다가 내려와 막걸리 마시며 소일하게 된다. 창업가는 청년 노년 구분할 것이 아닌, 그냥 창업가다. 인생은 넓은 우주에 점을 찍는 일 아닌가. 자신이 만족하는 점을 찍어야 한다.”
그는 20년 전, 시니어 시민기자들이 만드는 인터넷미디어 ‘실버넷뉴스’를 창간해 지금껏 운영하고 있다. “실버들을 위한 고민이 한 걸음씩 쌓인 것 같다”는 그는 생애 전 주기에 걸친 디지털치료제 개발로 ‘인생의 점찍는 일’의 궤도를 그려나가고 있다. #정 대표의 꿈: 미 CES의 키노트 연설자가 되는 것,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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