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에게는 회장님 분위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2014년 11월 KB금융지주 회장 자리에 오른 뒤 2017년 연임에 성공하고, 2020년에 3연임을 통과했지만 주변에선 ‘회장님’ 같은 엄숙함이나 권위감은 별로 찾아보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광주상고 출신으로 외환은행에 입행한 뒤 야간 대학을 다니며 주경야독(晝耕夜讀) 끝에 공인회계사와 행정고시에 합격한 경력은 ‘흙수저’ 성공 신화로 불릴 만하다.
윤 회장은 한마디로 ‘폼을 잡는’ 회장님과는 거리가 멀다. 회장 집무실에 보고를 하러 들어간 임직원들은 윤 회장의 몸에 밴 겸손함에 깜짝 놀란다. 보고를 하러 집무실에 들어가면 언제나 문 앞으로 먼저 나와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고, 보고 후 집무실을 나올 때도 사무실 밖에까지 나와 어깨를 두드려주며 격려한다. 하루에 수없이 많은 보고가 올라오지만 윤 회장의 이런 자세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멈추지 않은 도전人生
그는 1974년 광주상고를 졸업하고 고졸 행원으로 외환은행에 입사했다.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야간으로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다녔다. 입학 후 7년 만인 1982년에 성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은행원과 야간 대학생 생활을 병행하면서 공인회계사(CPA) 시험에 합격했다.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후 은행원에서 삼일회계법인 회계사로 자리를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웠던 1970년대 중후반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머리에 타고난 성실성으로 회계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삼일회계법인 회계사로 자리를 옮긴 후 이듬해인 1981년엔 25회 행정고시에 합격한다. 야간대학생 졸업반 때 CPA에 이어 행시까지 합격했으니 얼마나 성실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위 전력(前歷)이 행정 관료의 길을 가로막았다. 회계사의 길을 택한 것은 앞으로 걸을 길에 대한 숙명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삼일회계법인 전무와 부대표까지 회계사라는 한 길을 걸으면서도 그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야간이던 서울대 대학원 경영학과에서 석사과정에 합격해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군 제대 후 재무부 사무관으로 일하던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현 한미협회장)과 함께 대학원을 다녔다. 최 전 장관은 “당시 함께 공부한 윤종규는 아주 성실하면서도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언제 배웠는지 영어와 일어 독일어에도 능숙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 석사과정에 입학하려면 독일어가 필수였는데, 회계사를 하면서 야간 대학을 다니던 그가 언제 제2외국어까지 준비해 입학시험에 통과했는지는 성실함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경영학 박사 딴 뒤에 다시 방송대 법학과로
일하면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은 그는 삼일회계법인 전무 시절 성균관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상고를 나와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그리고 바쁜 회계사 생활을 하면서도 경영학 석사와 박사를 모두 야간으로 학위를 딴 것이다. 최 전 장관은 “윤 회장은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며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르면 노력을 멈출 법도 한데 그는 꾸준히 쉼 없이 노력하는 스타일이다”고 귀띔했다.
CPA를 하면서 법률 공부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경영학 박사를 딴 뒤에도 방송대 법학과에 진학해 법을 전공했다. 학업에 대한, 새로운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가 없으면 통상의 이력서에서는 보기 드문 학력(學歷)이다.
이 같은 성실과 노력, 그리고 뛰어난 머리는 금융계에서도 화제가 됐다. 지금은 작고한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은 2002년 3월 그를 국민은행 재무기획본부장(부행장)에 스카우트했다. 주택은행과 합병해 국민은행으로 거듭난 은행에서 순혈주의를 깨고 외부의 피를 수혈한 것이다. 국민은행 개인금융그룹 대표를 지낸 뒤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일하던 그에게 2010년 다시 KB금융지주 최고재무책임자(CFO) 자리에 발탁됐다. 회장과 행장의 갈등의 골이 깊어 ‘KB 사태’라는 갈등과 후유증으로 조직이 어수선했던 2014년 11월부터 KB금융지주 회장을 8년째 맡고 있다. 부행장 재직 때부터 그는 출퇴근할 때 직원들과 경비원들에게 먼저 웃으며 인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권위와는 거리가 먼 따뜻한 선배로서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KB금융 타운홀미팅, 현장과의 소통에 힘써
윤 회장은 취임 후 국민은행을 포함해 전 계열사를 방문해 타운홀 미팅을 열어 직원들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타운홀 미팅의 주인공은 회장이 아니라 직원들이다. 회장이 미팅을 이끌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직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윤 회장이 즉석에서 답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고객과 직접 마주치는 직원들에게 영업전략과 인력 양성, 시너지 등 다양한 주제로 얘기가 오간다.
콜센터 근무 직원이 타운홀 미팅에서 유튜브 채팅창을 통해 상담 업무에 대한 고민을 올리자 윤 회장은 “단순 작업은 챗봇이나 보이스봇 같은 AI(인공지능)나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고 콜센터의 근무 환경을 개선해 위상과 역량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답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타운홀미팅이 끝난 뒤에는 윤 회장이 추천도서 5권을 직원들에게 선물하고 직원들과 함께 셀카를 찍으면서 격의 없는 소통을 한다. MZ세대 직원들과는 e-소통라이브, 점심도시락 미팅 등 다양한 방식으로 격의 없는 소통으로 수평적이고 유연한 조직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KB금융은 MZ 세대 직원들이 경영진 마인드로 고민하고 회사 경영에 제언하는 ‘그룹 주니어보드’도 운영하고 있다. 윤 회장은 여기에서 MZ 세대를 만나 젊은 직원들의 생생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경영진의 얘기도 전달하고 있다. 윤 회장은 “미래의 CEO라고 생각하고 그룹을 이끈다면 어떻게 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해 미래의 경영자를 육성하는 것이 주니어보드의 목적”이라고 했다.
비인기 종목 선수들 발굴하는 이색적인 스포츠 마케팅
윤 회장의 사람 중심 경영은 스포츠 마케팅에서도 엿보인다. 스포츠 선수를 육성하고 지원할 때 가장 큰 원칙은 성장 가능성이 있는 유망주 발굴과 저변 확대가 필요한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후원하면서 꾸준히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다.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중장기적으로 긴 호흡을 갖고 선수들을 후원하는 것이 독특하다. 2006년 피겨의 김연아를 시작으로 지금은 피겨에서 차준환, 유영, 김예림, 이해인, 임은수, 신지아를 후원하고 쇼트트랙 최민정, 컬링 국가대표팀, 봅슬레이 원윤종, 서영우, 스켈레톤 윤성빈,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등을 후원하며 대한민국 동계스포츠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KB금융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골프와 수영과 육상, 기계 체조 등 기초 종목에서 차세대 유망주를 중심으로 하계 스포츠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비인기 종목을 중심으로 무명 시절부터 후원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시키는 차별화 전략이다. 윤 회장은 이들의 생일에 피규어 수제 케이크와 축하카드를 보내고 때때로 보양식을 전달하기도 한다. 전화나 카톡으로 소통하면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는 세심함도 엿보인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경영자, 그러면서도 소외된 그늘을 보듬는 일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윤종규호(號) KB금융그룹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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